- This topic has 0 replies, 1 voice, and was last updated 5 years, 5 months ago by YUKKA.
-
AuthorPosts
-
July 31, 2019 at 3:21 pm #1747YUKKAKeymaster
한국에서 과학자의 삶을 선택하고 과학자로 살아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기 위해, 연구비를 받기 위해, 받은 연구비를 올바르게 쓰기 위해, 쓴 연구비를 정산하기 위해, 수많은 논문과 서류를 읽고 작성하고 회의에 참석하면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당연할 수도 있지만, 많은 과학도와 과학자들이 과학자로 ‘살아갈 수 있기 위해’ 또는 ‘살아남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
‘왜 과학자가 되는가’ 내지는 ‘과학자는 왜 연구에 매진하는가’ 또는 ‘과학자는 어떤 요인으로 연구를 하는가’라는 의문을 가져 보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금전이라는 측면에서 안정적인 직장도 가지고 과학 사회에서 명성도 쌓으며 더 나은 인류의 삶을 위해 기여함으로써 세 가지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는 그런 ‘직업’일 수 있어서일까? 도대체 과학자들은 왜 연구를 하는 것일까?
‘과학의 가치중립성’에 대해서 과학이란 따지고 보면 세계를 보는 여러 시각 중의 하나일 뿐이며 따라서 매우 제한적인 지식일 뿐이고 과학의 순수한 가치중립을 옹호하는 것은 과학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는 이데올로기일 뿐이라는 등의 비판이 있기는 하지만, ‘과학은 언제 어디서나 객관적’이라고 전제해 볼 수는 있다. 하지만, 이와 같이 전제한다고 하더라도, 과학(연구)을 ‘한다’는 표현과 같이 ‘한다’라는 동사가 붙으면 더 이상 객관적일 수 없다. 왜냐하면 ‘과학(연구)을 한다’의 경우에는 바로 사람이 행위의 주체가 되기 때문이다. 즉, 과학을 하는 주체인 사람은 사회의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으며, 따라서 ‘과학을 하는 행위’의 성격과 과학자의 구체적인 ‘과학’의 내용은 그 과학자가 속해있는 ‘사회’나 ‘연구조직’에 따라서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도대체 어떤 사회적 요인에 의해 과학자가 되고 연구를 하는 것일까?
토마스 쿤처럼 ‘지식을 향한 사랑’만 있으면 자연의 이치를 탐구하거나 연구를 하는 것이 ‘재미있기 때문에’ 과학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만, 실제로는 그것만으로 과학자가 되기는 어렵다. 일례로 대학원생이나 박사후 연구원들에 대한 장학금 내지는 지원금을 지원받을 가능성과 그 지원금 규모가 과학 분야에 진출하는 사람 수에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피라미드 구조로 이루어진 과학 분야에 대한 사회 내에서의 연봉 등을 포함하는 금전적인 인센티브 역시 영향력이 크다고 볼 수 있다. 역사적으로 봤을 때, 국가 예산 증가 등으로 과학자 수요가 증가하더라도, 박사급 과학자를 추가로 배출하려면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 시장은 천천히 움직이고 또 반대로 수요가 줄 경우에 실제 박사급 과학자 수가 줄어들기까지 시간이 걸리긴 하지만, 과학자 규모는 다른 직업군들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금전적인 인센티브 등에 의존하는 경제적 관련성은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언급한 바와 같이, 과학자에게 있어서 금전적인 인센티브가 동기 부여의 전부는 아니라는 관점도 존재한다. 금전 이외의 인센티브도 과학자와 대학이나 연구소 양측에 중요하다. 과학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로부터 “수수께끼 푸는 게 재미있”다는 (진심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답변을 들을 경우가 많기는 할 것이다. 과학자들은 대부분 ‘문제 해결의 즐거움’에서 느끼는 만족감이 클 수도 있기 때문인데, 이 경우는 수수께끼를 풀고서 얻는 기쁨 자체가 연구에 따르는 보상의 일부인 셈이다. 하지만, 이것이 다는 아니다. 과학자는 자신의 연구 결과를 인정받으며 연구 수행의 동기를 부여받기도 한다. 바로 로버트 머튼의 ‘인정에 대한 욕구’라는 개념인데, 머튼은 과학자가 과학 지식을 생산하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가장 중요한 인센티브가 최초 발견자라는 ‘우선권’을 놓고 벌이는 경쟁이라고 생각했다. 즉 과학자에게는 발견의 우선권 확보를 통한 ‘명성’의 획득도 중요한 요인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명성은 연구 결과를 최초로 발표함으로써 얻을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일반적인 학문 분야에서와는 그 의미가 조금 다른, ‘승자독식’이라고도 볼 수 있는 과학 분야에서의 ‘우선권’이라는 시스템은 왜 생겨난 것일까?
먼저 과학 지식의 발전 또는 그 변화에 관해 살펴 보면, 비록 토마스 쿤은 ‘과학 혁명의 구조’에서 격변적 모형으로 과학의 발전을 설명하고 있지만, 누가적 모형이나 칼 포퍼의 진화적 모형, 그리고 래리 라우든의 점진적 모형 등으로 과학 지식의 발전을 설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과학 지식의 발전에 관한 어떠한 모형을 따르더라도, 과학 지식의 변화를 이끌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기존의 이론에 대해서 알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프랜시스 베이컨의 ‘아는 것이 힘이다’라거나 아이작 뉴튼이 그의 경쟁자였던 로버트 후크와 공로에 관해 언쟁을 벌이는 편지에서 사용한 것으로 유명한 “내가 더 멀리 보았다면 이는 거인들의 어깨 위에 올라서 있었기 때문이다”라는 표현, 그리고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의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고, 따라서 ‘우선권’을 과학자에게 인정함으로써 이러한 과학 지식의 발전 과정에서의 그 기여도를 인정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과학자가 획득한 우선권에 대한 공로를 인정하는 방식에 대해서 살펴보면, 그 인정 방식은 과학계가 수수께끼를 풀거나 새로운 발견을 하는 것 등에 대해 애착을 갖는 것만큼이나 다양하다. 최상위 우선권은 발견에 과학자의 이름을 붙이는 명명 방식이라고 볼 수 있다. 예컨대 허블 망원경은 1929년에 우주의 팽창을 발견한 천문학자 에드윈 허블의 이름을, 그리고 리히터 지진계(Richter scale, 지진파의 진폭, 주기, 진앙 등을 계산해서 지진의 규모를 나타내는 척도)는 1935년 미국 캘리포니아 공과대학(California Institute of Technology, Caltech)에서 지진계를 고안한 찰스 리히터의 이름을 따왔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슈뢰딩거 방정식, 보일의 법칙, 그리고 패러데이 상수나 플랑크 상수와 같이 과학자의 이름이 붙은 수많은 방정식이나 법칙, 그리고 상수들을 포함해서 과학 분야에는 이와 같은 명명 사례들이 매우 많다.
우선권에 대한 인정은 상의 형태로도 표현된다. 과학 분야에서는 노벨상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지만 상의 종류는 수백 가지에 달하며 해마다 새로운 상이 생겨나고 있다. 그리고, 미국의 국립 아카데미 회원 선정 등의 형태로도 과학자가 획득한 우선권에 대한 공로가 인정되기도 한다.
즉, 과학자는 발견의 ‘우선권’ 확보를 통해서 ‘명성’을 획득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과학자들이 자신의 발견을 적절하게 공유하도록 장려하는, 즉 우선권을 기반으로 하는 이러한 보상 체계는, 과학 지식이라는 것이 경제학자들이 이야기하는 소위 ‘공공재(public goods)’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기능적이라는 점에서 아주 특별하다. 이유는, 일반적으로 지식이란 ‘공공재’로서의 특성, 즉 비배제성(nonexcludable)과 비경합성(nonrivalrous)이라는 특성을 지녔는데, 과학 분야의 우선권을 기반으로 하는 보상 체계는 경제학에서 이야기하는 시장에서는 줄 수 없는 인센티브를 과학자에게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제학에서 공공재의 고전적인 예는 등대이다. 등대를 설치하면 누구든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비배제적이다. 동시에 사용자가 늘어나더라도 타인의 등대 사용 편익이 감소하지 않으므로 비경합적이다. 따라서 과학 지식도 공공재라고 볼 수 있다. 일단 연구 결과가 공표되면 다른 사람들이 지식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배제하기 어렵고, 또 연구 결과가 공유된다고 해서 그 과학 지식이 고갈되지 않기 때문이다.
경제학자들이 주로 연구하고 언급하는 시장은 이러한 공공재 특성을 지닌 재화를 생산하기에는 매우 적합하지 않다. 즉, 재화 생산에 따른 이익 또는 인센티브가 없다는 뜻인데, 경제학자들은 이러한 경우에 대해서 ‘시장 실패’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공공재는 소비자가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도 재화를 사용할 수 있으므로 무임승차를 불러올 수 있고, 이와 같이 타인의 접근을 제한하지 못한다면 이익을 얻기 어렵기 때문이다. 유사한 무임승차 문제가 과학자들 사이에도 존재한다. 빵집 주인이라면 손님에게 빵이나 케이크를 팔면 되고 야구팀은 경기 티켓을 팔면 되기 때문에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사람들을 배제할 수 있지만, 과학자는 연구 성과가 출판되어 공표되어 버리면 타인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막을 방법이 없다. 연구 성과에 따른 이익이라는 가치를 평가할 길이 없는 셈이다. 더욱이 시장이 그 가치를 평가하든 안 하든 연구 성과가 실제 상품으로 완성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는 기초연구는 더욱 값을 매기기 어렵다. 금전적인 인센티브가 부족하면 사회에 필요한 연구보다 매우 적은 연구가 수행되는, 즉 경제학자들이 ‘시장 실패’라고 일컫는 상태에 이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장 실패’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케네스 애로의 말처럼 “사회는 시장보다 훨씬 영리”해서 – 개인적으로는 경제학이 시장을 단순하게 정의했기 때문에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경제학이라는 학문의 객체로서의 시장과 실제 시장 사이의 괴리를 의미하는 표현이며 현재의 경제학이라는 학문의 한계점을 적시하는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 우선권 체계라는 지식의 생산과 공유를 장려하는 보상 체계를 만들며 진화를 거듭해왔다. 과학자는 발견의 우선권을 확보하려는 열망으로 연구 수행의 동기를 가지게 되며, 과학자들이 연구 결과에 대해 소유권을 주장하려면 자신의 발견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해야만 한다. 과학자들은 자신의 발견을 나눔으로써 그 연구 결과를 소유할 수 있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과학자들은 전문가로서 명성을 쌓고, 그 명성이 좀 더 높은 연봉이나 컨설팅 기회, 공개적으로 기업과 거래하는 과학자문위원회와 같은 형태의 재정적인 보상을 간접적으로 가져다준다.
그렇지만, 과학자들이 ‘우선권’ 획득을 위해 모든 것을 내준다는 의미는 아니다. 어떤 연구는 특허로 이어지기도 하고 어떤 연구는 연구 수행에 필요한 기술이 베일 속에 가려지기도 한다. 즉, 과학 지식이 ‘공공재’의 성격을 가지기만 하는 것은 아니며, 특허나 비밀 등의 형태로 존재하기도 한다. 여기서 과학자의 노력에 의한 연구 성과의 전유성(appropriability) 문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전유성이란 기술혁신에 대한 수익을 배타적으로 보호·확보할 수 있는 정도를 뜻하며, 특허(patent), 영업비밀(secrecy), 시장선점(first mover advantage), 보완적 판매 및 서비스(complementary sales & service), 보완적 제조(complementary manufacturing) 등 다양한 전유 장치(appropriability mechanism)를 통해서 연구 성과에 대한 전유성이 확보되기도 한다. 언급했던 바와 같이, 연구 성과의 전유성 문제를 ‘우선권’이 해결하는 경우도 있지만, ‘우선권’ 획득이 자원의 문제까지 해결하지는 못한다. 연구에는 비용이 많이 들게 마련이며, 과학기술의 기업의 성장과 국가의 경제발전을 도모하고 지식기반 경제에서 비속 가능한 경제성장을 이끌어 내는 핵심 원동력으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특허, 저작권 등 지식재산권은 발명가에게 독점적인 권리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전유성과 자원 문제를 해결하기도 한다. 하지만 사회의 관점에서 보자면, 특허 정보를 공개하는데도 불구하고 특허는 특허출원자가 창조한 지식을 바탕으로 그 위에 지식을 쌓지 못하도록 제한하므로 과학 지식 또는 기술의 누가적이며 진화적이고 점진적인 누적성에 장애물이 된다는 문제가 생긴다. 과학자의 노력에 의한 연구 성과의 전유성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한 형태인 특허 제도는 어떤 과정을 거쳐서 생겨난 것일까?
르네상스 운동이 가장 활발하였던 15세기 이탈리아의 베니스의 기술자들은 자신의 발명이 공개될 경우 발명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잃어버릴까 두려워했다고 한다. 그 결과로 발명의 기술적 내용은 한동안 암호 등 타인이 알아보기 힘든 방법으로 표현되었다. 하지만 이후 새로운 발명이 비밀로 숨겨져 있기만 한다면 과학 지식과 기술의 누가적이며 진화적이고 점진적인 발전이 어려울 것이라는 인식이 점차 확대되었고, 1474 년에 베니스공국은 마침내 특허법이라고 할 수 있는 제도를 시행하게 된다. 즉, 새롭고 창의적인 장치(new and inventive device)를 잠재적인 침해자로부터 보호를 받으려면 국가에 신고하도록 했으며, 10년의 보호기간을 인정하는 제도를 시행한 것이다.
최초로 성문법화된 특허제도는 1623년에 영국에서 만들어졌다. 영국이 특허제도를 도입하게 된 배경은 주목할만하다. 영국은 17세기 초, 유럽대륙의 국가에 비하여 공업 기술에서 후진성을 면치 못했다. 반면 당시 스위스는 시계 공업과 철 가공업이 발달하였다. 영국은 이 기술들을 도입하기를 원했으나 스위스 기술자들이 기술을 공개하기를 극도로 꺼렸으며 그 기술은 영업비밀(trade secret)로 잘 보호되고 있었고 장치 또는 시스템의 기술적인 원리를 구조분석을 통해 발견하는 역공학(reverse-engineering)하기도 어려웠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 즉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영국은 특허장(Letters Patent)을 부여하고, 이를 오늘날 특허법에 해당하는 전매조례(Statute of Monopolies)로 발전시킨다. 이 법이 선포되자 과학 지식 또는 기술에 대한 강력한 독점권을 기대한 유럽대륙의 기술자들이 영국으로 몰려들었고 독점권을 얻는 대가로 그들의 과학 지식 또는 기술에 대한 노하우를 문서로 공개하였다. 과학자 및 기술자와 이들이 가진 과학 지식과 기술이 모여드니 자연스럽게 이를 바탕으로 영국에서는 산업혁명이 일어날 수 있었으며 18세기에는 영국이 세계를 지배하게 된 원동력이 되었는데, 이는 어떤 의미에서는 필연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유럽대륙의 독일의 경우에는 당시 통일국가가 아니었기도 해서 기술 수준이 영국이나 프랑스 이탈리아 등에 비해 후진성을 면치 못 하였는데, 독일의 원천기술이 부족함을 인식하는 한편 국가의 기술력을 높이기 위해서 기존의 기술을 간단하게 개량하는 경우에도 권리를 부여하는 ‘실용신안제도’를 세계에서 처음으로 창안함으로써 오늘날 기술 선진국을 위한 초석을 마련했다. 실용신안제도는 후에 일본이 이어받았고 우리나라도 일본으로부터 배워 지금껏 이 제도를 채택하고 있다.
서유럽 선진국의 사례로부터 국력 신장에 기술과 특허의 중요성을 간파한 미국은 독립 후인 1790년에 특허법을 채택한다. 초대 특허청장은 3대 대통령인 토마스 제퍼슨이었다. 초기의 출원인은 특허 기술내용을 실현한 Working model을 제출해야 했으나 번거로워 이를 폐지했는데, 1853년에 심사를 통과하는 경우 등록을 허락해주는 심사주의로 전환한다. 1952년에는 특허 등록을 위한 요건으로서 진보성(Non-obviousness)의 개념을 도입하여 현대적인 특허법의 기틀을 마련한다. 디자인특허(design patent)와 식물특허(plant patent)도 특허제도에 편입하는 등 특허의 대상도 점차 확대하게 되는데, 1980 년에 미국연방대법원은 Diamond vs. Chakrabarty 사건 판례에서 기름을 분해하는 미생물에 대한 특허를 허락하면서 “Anything under the sun made by man is patentable.”이라는 유명한 문구를 남긴다.
특허제도에 대한 미국인의 자부심은 대단하여, 미국은 오랜 기간동안 선발명주의(first-to-invent system)를 고수하는 세계에서 유일한 나라였다. 선발명주의란 동일한 발명이 출원된 경우 먼저 발명한 자에게만 특허권을 부여하는 제도인데, 미국 외 다른 모든 국가에서는 발명품의 특허등록을 요청하는 출원서의 제출 순으로 특허등록을 허락하는 선출원주의(first-inventor-to-file system)를 채택했다. 미국은 선발명주의를 통해 최초의 발명자를 보호함으로써 번잡하고 사회적 비용이 들더라도 진실을 택한 것이고 다른 나라의 경우는 진실을 다소 포기하더라도 안정성과 효율을 중시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선발명주의는 사문서위조, 분쟁 발생 시 최초 발명자 규명의 어려움 등 취지에 비해 많은 문제점을 낳았고 결국 선출원주의로 변경하는 개정 법안이 통과된 후 2013년 3월 16일부로 선출원주의를 취하고 있다.
국가의 성장동력으로서 발명과 특허를 존중한 결과 미국에는 발명가로서 유명인사가 꽤 많다. 또한 발명가로 서 창업하여 성공을 이룬 기업가도 부지기수다. 발명가의 이름과 회사 이름이 일치하는 예로는, 엘리베이터의 오티스(Elisha Otis), 타이어의 주재료인 가황고무를 발명한 찰스 굿이어(Charles Goodyear), 에어콘을 발명한 캐리어(Willis Carrier), 자동차의 포드(Henry Ford), 롤 필름을 발명한 이스트만(George Eastman), 청바지의 스트라우스(Levi Strauss), 에어브레이크를 발명한 웨스팅하우스(George Westinghouse) 등이 있다.
(과학은 자본주의 태동의 원인 중 하나이며, 현재의 과학자는 자본주의의 전형적인 구성원 중 하나이다.)
(to be continued…)
-
AuthorPosts
- You must be logged in to reply to this topi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