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cember 5,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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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알고싶다(004) — 과학에서의 인식론: 철학적 관점 (1)

 

과학에 있어서의 진리 탐구는 자연 현상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시작한다. 이는 우리가 인식하면서 살아가고, 살아가면서 인식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나무의 녹색과 향기를 인식한다. 나무가 저 앞에서 서 있으므로 나는 그것을 피해서 돌아갈 수 있다. 나는 타인의 마음과 의도를 읽는다. 나는 사랑이 불변적이 아니라는 것을 경험한다. 나는 인간의 보편적 본질이 무엇인지 차츰 깨닫는다……

 

인식에는 본능적 직감같이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것이 있고, 경험과 교육을 통해 후천적으로 획득되는 것도 있다.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지만 내가 그것을 알고 있음을 의식적으로 자각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인식에는 나무와 같은 개체에 대한 인식이 있고, 인간의 본질에 대한 인식과 같이 보편적인 것에 대한 인식이 있다.

 

한편 ‘우리가 나무를 어떻게 인식하는가’라는 물음과 같이 인식 과정을 반성해보고 인식 현상을 있는 그대로 기술하려는 시도에 대한 인식이 있으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어떤 방법을 통해서 있는 그대로의 사물과 사물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는가’라는 인식 방법에 대한 인식도 있을 수 있다. 이러한 노력은 또한 모든 학문의 학문으로서의 조건과 탐구방법, 그리고 학문들의 기본 개념 규정을 제시하려고 시도하기도 한다.

 

나뭇잎이 푸르다는 것은 사물에 대한 직접적인 체험이다. 그런 체험에서 우리의 의식은 바깥으로 뻗어나가 있다. 그런데 나뭇잎이 푸르다는 것을 내가 어떻게 인식하는가에 대한 인식은 사물에 대한 인식이 아니라 사물의 인식에 대한 인식이다. 인식의 인식에서 우리 의식은 바깥이 아니라 안으로 굴절되어 들어온다. 사물에 관한 단적인 인식에 비해 인식의 인식은 한 차원 더 깊고 난해한 것이다.

 

‘만물은 변화한다’는 말은 보통 진리라고 여겨진다. 만물의 변화는 언제 어디에서나 타당하고 누구라도 인정할 수 있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보통 진리라고 불리우는 것은 영원 불변하고 보편타당한 것이며 그와 더불어 ‘1+2=3’과 같이 뻔한 것이 아니라 깊은 사고를 요하는 심오한 어떤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진리는 일상적 의미의 진리와는 다른 것으로 사람에 따라 각기 다르고 다양하게 규정될 수 있는 것이다.

 

진리는 찾기 어렵지만 어디엔가 존재할 것만 같고 존재해야만 할 것 같다. 그리고 과학을 통해서 ‘진리’를 탐구한다고 한다. 그렇지만 진리를 어떻게 찾을 수 있는가? 어떤 것이 진리가 될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인가? 진리는 확실히 존재하는가? 이런 질문들을 묻기 시작하면 우리는 미궁으로 빠져들며 어떤 물음에도 확실하게 대답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어떤 회의주의자는 진리는 없다, 진리가 있다고 해도 알 수 없다, 알 수 있다고 해도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대개의 사람들은 만일 진리가 없다면 모든 학문 활동과 철학적 사고가 무의미해지고 삶은 혼란에 빠지게 되므로, 진리가 있다고 전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이것은 진리가 꼭 필요하니까 그것이 없다고 주장하면 안 된다는 식의 억지 주장이다. 그것은 내가 집에 갈 차비가 없으면 밤거리를 헤매게 되므로 차비가 없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식의 주장이라고 볼 수 있다. 아무튼 진리가 있다는 믿음이 압도적이고 지배적이다. 진리가 어떤 형태인지 알지 못한다면, 진리의 존재 여부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진리가 어떤 모습인지에 대한 일치된 견해는 아직 없다.

 

진리에 대한 여러 입장들 중에서, a.’나무가 푸르다.’는 명제는 나무가 정말로 푸를 때에만 진리라고 보는 입장이 있다. 이것은 사실과의 합치 여부가 명제의 진위를 결정한다는 대응설적 진리관이다.  b.그리고 논리적 모순이 없는 것이 바로 진리라는 정합설적 진리관이 있다. ‘a>b, b=0, a<0’라는 세 가지 주장이 동시에 옳을 수는 없고 따라서 이는 모순이므로 진리가 아니다. c.실용주의적 진리관은 보다 좋은 결과를 낳게 하는 명제가  진리라고 주장한다. 제주도까지 걸어서 간다, 배를 타고 간다, 비행기를 타고 간다, 이 가운데 비행기를 타고 간다는 것이 진리라는 입장이다.

 

인류 역사상 엄청난 숫자의 인간들, 과학자들이 자신의 생각을 진리라고 주장했다. 심지어 화가나 조각가까지도 자신이 믿는 세계의 참모습을 그리거나 조각했다. 모든 인간은 각기 다른 몸을 가지고 있다. 각자의 몸은 각자가 세계를 내다보는 창과 같다.  게다가 모든 인간은 각기 다른 영혼을 가지고 있으며 태어난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른 세계관과 지식을 획득하게 된다. 한 인간이 주장하는 진리는 단순한 지성적 사고에 의해 단번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몸과 인격과 시대의 흐름이 합쳐진 아주 깊은 우물에서 형성된 것이다.

 

종교개혁, 르네상스, 그리고 과학혁명을 거치면서 권위와 관습이 타파되고 그 대신에 인간 이성에 대한 신뢰감이 높아지게 되었다. 따라서 진리는 더 이상 전통과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 진리를 찾는 방법에 의존하면서 추구되었다. 근세에서 우주 속의 인간의 지위는 중앙에서 주변으로 떨어지고 신 중심의 목적론적 세계관(이 우주의 존재 목적과 도달 목적은 신에 의해 미리 규정되었다는 우주관)이 쇠퇴하게 되었다. 그 대신에 원인과 결과의 단순한 연쇄적 관계로 진행되는 기계론적 세계관(이 우주가 특별히 정해진 목표 없이 단순히 우주 속에 내재하는 법칙에 의해 움직인다는 우주관)이 등장한다. 자연과학의 발달에 영향을 받은 기계론적 자연과학적 세계관의 우세와 더불어 우리가 스스로 관찰하지 않은 것이나 수학적 원리에 맞지 않는 것은 배척된다. 그리고 관찰, 실험, 수학적 계산이 과학과 철학을 떠받치는 기둥이 된다.

 

인간은 어떻게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가? 인간이 인식한 것이 어떻게 바깥 세계의 사실과 맞아 떨어질 수 있는가? 근세에서는 두 가지 입장이 대립되었다. 경험론은 보고 듣고 만지는 다섯 가지 감각을 통한 경험 없이는 어떤 지식도 있을 수 없다는 입장이고, 합리론은 인식의 근원은 경험이 아니라 우리가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이성이라는 입장이다. 합리주의자에 의하면 우리의 오관은 착각할 수 있으므로 철학의 절대적으로 확실한 토대가 될 수 없다. 특히 데카르트(1596-1650)에 의하면 ‘모든 물체는 부피를 가진다, 2+3=5, 사각형은 네 개의 변을 가진다…….’는 인식에 오관이 사용된 것이 아니라 이성적 합리적 통찰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데카르트’ 하면 방법적 회의가 떠오른다. 과거의 나는 의심을 통해 의심할 수 없는 확실한 것을 찾아내려고 했던 데카르트 철학을 의심할 능력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 데카르트가 의심스럽다. 모래를 모두 골라내면 금만이 남는다는 생각은 오로지 모래에 금만이 섞여 있을 때만 옳은 것이다.

 

자연과학의 발달과 더불어 근세 시대의 이상과 모범은 수학이었다. 데카르트도 철학은 일종의 수학, 즉 보편 수학이어야 한다고 보았다. 수학이 기본적 공리에서 출발하여 일체의 것을 도출해내듯이, 철학도 하나의 근본개념에서 출발하여 엄밀한 연역적 방법을 통해서 일체의 것을 도출해낼 수 있어야 한다. 데카르트철학의 출발점이 되는 아르키메데스(BC 288-BC 212)적인 ‘점’(참고로, 유클리드 기하학의 첫 문장은 ‘점은 부분이 없는 것이다’이다.)은 바로 ‘자아’이다. 데카르트는 모든 것에 대한 의심을 거쳐서 자아의 존재를 찾아내고, 이러한 자아 존재의 확실성에 근거하여 신의 존재를 증명한다. 그리고 신 존재 증명을 통해 모든 지식의 확실성에 도달한다.

 

이와 같이, 확실한 진리를 찾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의 회의를 방법적 회의라고 부른다. 데카르트는 우선 ‘감각 경험이 과연 세계 인식의 기초가 될 수 있는가’하는 의심을 던진다. 내가 보고 있는 저 불이 정말로 외부에 실재하는 불인지 알 수 없다.  그것은 꿈에 불과할 수도 있고 신이나 악마의 장난으로 인한 착각일 수도 있다. 실제로는 불도 내 눈도 내 몸도 없는 것일 수도 있다…… 나의 수학적 계산에 오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악마의 조작으로 인해 내가 그것을 진리라고 착각할 수도 있다. 데카르트에 의하면 이 모든 것을 의심하고 착각해도 의심하고 착각하는 나의 존재는 의심 불가능하다. 즉, 자아는 존재한다. 자아는 사유하는 존재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진리이다.

 

자아가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자아의 본성이 사유라는 것은 직관적으로 통찰 가능 체계가 그 위에 세워져야 할 필수불가결한 기반이다. 모든 진리의 인식은 반드시 자아를 통로로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자아 안에는 나무와 같이 바깥 사물에 의해 생긴 외래 관념과, 언어, 도깨비와 같이 인위적으로 지어낸 인위적 관념이 있는 반면에 마음 안에 저절로 생긴 관념, 오직 나의 생각하는 능력에서 유래하는 관념인 본유 관념이 있다. 이러한 본유 관념에는, 자아나 진리라는 관념, 물체의 관념 ‘a=b, b=c이면 a=c’라는 수학 공리, ‘원인=결과’라는 인과법칙, 신 관념 등이 포함된다.

 

내가 가지고 있는 신 관념(무한, 영원불변, 전지전능, 창조주)은 외부 사물에서 온 것도 아니고 인위적 가공물도 아니다. 그것은 완전한 존재인 신으로부터 온 것일 수밖에 없다. 불완전한 존재에서 완전한 존재의 관념이 파생될 리는 없기 때문이다. 내 안의 신 관념의 원인은 내가 아니라 신 자신이다. 신은 우주를 창조하고 인간을 창조했으며, 인간 정신 안에 자신의 흔적을 남겨 놓았다. 화가가 자신의 그림 밑에 사인을 하듯이, 신은 내가 신의 피조물임을 표시해 두기 위해 내 안에 신 관념을 남겨 놓았다. 이렇게 해서 내 속의 신 관념의 원인인 신이 존재함이 확실해진다.

 

나의 마음은 신이 창조한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마음을 올바르게 사용하기만 하면 나는 틀림없이 세계에 관한 진리를 얻을 수 있다. 우리의 오류는 자유 의지의 남용에서 비롯된다. 만일 내가 명석하게 참으로 인식한 것만을 진리로 받아들인다면 어떤 오류도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신은 완전자이므로 나로 하여금 거짓을 진리로 믿도록 나를 기만하지는 않을 것이다. 신은 진리의 보증자이다.

 

데카르트는 자아와 자아 아닌 것, 즉 정신과 물질을 이원론적으로 날카롭게 구분했다.  이 세계의 모든 실체는 정신이거나 물질이다. 정신은 물질의 작용에 의한 것이 아니며, 물질 또한 정신의 산물이 아니다. 정신은 연장(부피=물질의 본질)이 없는 사유 실체이며, 물체는 사유하지 않는 연장 실체이다. 이런 이원론은 종교적 신앙을 위한 정신 세계를 보장해주는 동시에 자연과학자의 탐구 원리를 인정하게 해준다. 신학자는 자연과학과 독립적으로 신과 정신에 관한 학설을 세울 수 있으며, 자연과학자는 신학과 독립적으로 자연에 관한 이름을 세울 수 있는 권리가 있다.  특히 자연계는 단순한 물질적 힘들의 기계적 체계이므로 신이나 천사조차도 물리학 법칙을 변경시키거나 방해할 수 없다. 그러므로 자연계의 탐구는 과학자에게 일임해야 한다. 신학자는 자연에 대한 과학적인 주장을 할 수 없으며 자연과학 이론에 이의를 제기할 수도 없다. 이것은 당시로서 대담한 견해이며, 이런 견해에 따른다면 지동설을 주장한 과학자를 종교재판에 회부하거나 처형함은 당연히 부당한 일로 간주되어야 한다.

 

스피노자(1632-1677)는 데카르트의 인식론이 순환논법이라고 비판한다. 데카르트는 자아의 본유 관념에 근거해 신 존재를 논증하고 다시 신 존재와 신의 자비를 빌어 본유 관념의 참됨과 이성 사용의 정당성을 논증한다. 스피노자의 대안은 어떤 관념의 참됨을 보증받기 위해 신의 존재는 필요로 하지 않으며, 그 관념이 참됨을 직접 파악하는 것이 진리의 유일한 도달 방법이다.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아무리 해도 알 수 없다.

 

로크(1632-1704)는 우리 인식의 한계를 인식하고 그것을 포괄적으로 다룬 최초의 근세 철학자이다. 로크는 데카르트의 본유 관념을 거부하고 우리 영혼은 태어날 때 아무것도 쓰여지지 않은 백지와 같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경험에 의해서 비로소 인식을 갖게 된다. 로크에 의하면 경험이 모든 관념과 지식의 근원이면 경험적 지식만이 유일하게 가능한 지식이다. 로크가 말하는 경험이란 언어 습득과 같이 지혜를 얻는 고차원적 과정이 아니라 보고 듣고 맛보는 오관의 감각 경험을 의미한다. 경험을 인식의 유일한 근원으로 보는 이러한 경험론은 ‘감각 속에 없었던 것이 오성 속에 있을 수는 없다.’는 중세의 아퀴나스(1225-1274)의 사상 속에 이미 함축되어 있었다.

 

우리 바깥의 사물은 색, 맛, 부피 등의 관념을 우리 안에 생겨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런 힘이 바로 사물의 성질들이다. 사물의 성질은 감각 경험을 통해 우리 안에 관념이 생기게 만든다. 그러므로 사물에 대한 우리의 관념은 우리가 제멋대로 지어낸 것이 아니라, 사물의 힘과 마음의 능력이 함께 만든 것이다. 관념은 외부 대상 그대로를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관념은 대상 자체를 닮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대상 자체, 즉 실체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떤 것이다.

 

사과의 빨간색과 신맛 그리고 향기….. 그 모든 성질들을 제거한다면 맨 끝에 사과의 실체가 남는다. 실체는 모든 성질들을 매달고 있는 어떤 것이다. 그러나 실체가 어떤 것인지는 인간에게 인식 불가능하다.

 

흄(1711-1776)은 뚜렷하고 생생한 지각인 인상을 인식의 가장 신뢰할 만한 원천이라고 보았다. 즉, ‘나는 난생 처음 들판에 핀 새빨간 양귀비꽃을 본다. 그리고 나는 양귀비꽃이 붉다는 것을 인식한다’는 것이다. 인상에 회부될 수 없거나 인상과 합치하지 않는 관념이나 지식(양귀비꽃은 보라색이다.)은 타당한 관념이나 지식이 될 수 없다. 감각 지각의 배후에 있다고 가정되는 실체나 자아, 인과관계 같은 것에 대응되는 인상은 그 어디에도 없다.  그러므로 실체, 자아, 그리고 인과관계는 허구에 불과하다. 내가 안 볼 때에도 저 나무가 저기에 지속적으로 있다는 믿음이나, 저 나무의 인상에 대응되는 나무가 저 바깥에 실재한다는 믿음, 그리고 저 나무의 실체가 있다는 믿음은 부당하다. 인상들은 경험의 최종적 소여(주어진 것)이며 우리는 이것들을 넘어서 보다 더 궁극적인 어떤 것으로도 나갈 수 없다.

 

흄에 의하면 자아에 해당되는 어떤 인상도 존재하지 않는다. 자아는 자기 동일적 실체가 아니며 단지 빠른 속도로 변하며 붙잡기 어려운 여러 가지 의식 내용들의 집합에 불과하다. 인간관계 역시 대응되는 인상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이므로 객관적 실재가 아니라 단지 주관적인 믿음에 불과한 것이다. 원인과 결과 사이에 상호관계는 있으나 둘 사이에 선후관계(원인이 먼저 일어나고 그 뒤에 결과가 일어난다.)만 있을 뿐이고 인과관계(원인 때문에 결과가 일어난다)가 있는 것은 아니다. 먹구름과 비처럼 원인으로 간주되는 사건과 결과로 간주되는 사건을 인과관계에 있다고 보는 것은 두 사건의 반복되는 관찰과 습관에 근거하는 것이다. 두 사건 사이의 인과 관계는 사실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단지 주관적인 믿음과 주관적인 연결에 근거한 것일 뿐이다. 우리는 먹구름도 보고 비도 맞지만 먹구름과 사이의 인과관계는 허구에 불과하다.

 

흄의 인과관계에 대한 비판은 칸트(1724-1804)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칸트는 흄 때문에 독단의 선잠에서 비로소 깨어났고 사변 철학 연구에서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가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흄은 형이상학(참고로, 아리스토텔레스(BC 384-BC 322)의 저작을 그의 제자들이 정리하면서 무제로 된 형이상학 부분을 물리학 부분 다음에 끼워놓고 마땅한 이름을 찾다가 ‘물리학 뒤에 놓인 것(ta meta physika)’, 즉 형이상학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그 후에 형이상학은 ‘물리학 뒤에’가 아닌 ‘물리학을 초월한’이라는 뜻으로 그 의미가 상징화되었다. 즉 형이상학은 물리학보다 한 차원 더 깊이 들어가서 자연의 배후에 있는 궁극적 원리를 탐구하는 분과이다.)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형이상학이란 인간지성으로 풀 수 없는 문제를 풀려고 버둥거리는 헛된 짓이고 사이비 철학이다.’ 흄은 수학이나 경험적 학문 이외에 모든 여타의 것을 버릴 것을 요구했고 인간 지성이 초감성적 영역으로 탈선하여 방황하지 말고 엄격히 경험의 영역에만 머물 것을 요구했다.

 

칸트는 인간이 선천적 인식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경험이 인식에 필수 불가결하다고 주장함으로써 합리론과 경험론을 종합한다. 우리 인식의 한계를 인정하며, 인간 인식과 궁극적 실재가 대응된다는 것을 거부하는 점에서 칸트는 합리론을 일부 수정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칸트에 의하면 인간 인식에는 인간의 선천적 인식 형식이 개입되고 반영된다. 그리고 인간의 인식 형식의 구조에 의해 절대로 포착 불가능한 대상이 존재한다. 다른 한편으로 칸트는 우리의 지식이 경험과 더불어 시작되지만 모든 지식이 경험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함으로써 경험론의 일부를 수정한다.

 

인식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요소가 필수 불가결하다. 마치 흰떡을 뽑기 위해서는 쌀가루와 떡기계가 필요하듯이 인식에도 감성을 통해 바깥에서 받아들여지는 인식 재료와, 그 재료를 정리 결합하여 판단하는 오성(사유능력)의 기능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감각 경험을 통해 인식 재료가 우리 안으로 들어올 수 없는 대상들(영혼, 신, 우주)에 대해서는 인식이 이루어질 수 없다. 그렇게 우리가 아무리 해도 인식할 수 없는 영역은 ‘물자체’의 세계라고 불리운다.

 

우리 감성의 선천적 형식은 시간과 공간이고, 오성의 선천적 형식은 12개의 범주(오성 개념)이다. 시간과 공간은 상식처럼 바깥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자연을 경험할 때 대상에다 투입하는 우리의 인식틀이다. 12범주 가운데에는 흄이 단지 우리의 주관적 믿음에 불과하다고 보았던 인과관계도 들어 있다. 인과관계가 흄에 있어서는 생활에 유용한 착각과 믿음에 불과한 것이었다면, 칸트에 있어서는 인과관계란 우리 안에 선천적으로 갖춰져 있는 인식 형식 가운데 하나이다.

 

인식 능력에는 감성과 오성과 이성이 있다. 진정한 인식은 감성과 오성의 협력으로 이루어지며, 알 수 없는 세계에 대한 불완전한 인식은 이성에 의해 추구된다. 감성이 직관의 능력이고, 오성이 판단의 능력이라면 이성은 결론을 도출하는 능력이다. 오성이 유한한 것을 취급한다면 이성은 무한한 것, 무제약적인 것을 추구한다. 이성은 감성과 오성을 초월하여 더 높은 단계로 넘어서서 인식을 종합 통일한다. 오성이 잡다한 감성적 수용물을 정리 정돈 한다면, 이성은 오성 작용의 체계화를 위해 통제하고 지도한다.

 

이성은 인식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으며 단지 오성이 어떻게 작용해야만 하는가 하는 규칙만을 제공하는 규제의 원리이다. 이성은 오성에게 명령한다. 마치 모든 심리 현상의 근저에 한 통일체인 영혼이 있는 듯이 심리 현상들을 상호관련지어야 한다거나, 마치 현상의 근저에 무제약적 통일체인 세계가 있는 듯이 생각하라, 그리고 마치 존재들의 제일 원인인 신적 창조자가 있는 듯이 생각하라는 것이다. 칸트에 의하면, 이성은 신, 영혼, 우주 등의 초월적 세계에 대한 인식 욕구를 가짐으로써 우리의 인식을 촉진하며, 그런 의미에서도 이성은 인식 규제적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칸트에 의하면, 감성적 재료가 전혀 없는 신, 영혼, 우주 전체에 관해서는 진정한 의미의 인식이 성립할 수 없다. 따라서 ‘형이상학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대한 칸트의 대답은 부정적이고 파괴적이다. 형이상학은 진정한 의미의 인식도 학문도 될 수 없다. 영혼론은 경험 한계를 초월해 있는 대상에 대한 인식 기능의 잘못된 적용이고 기만이다. ‘우주론은 세계의 시초가 있다, 세계의 시초가 없다’와 같이 논리적으로 동시에 성립하기 어려운 결론을 도출한다(이율배반). 신학은 신 관념이 필연적인 것(유연적 존재가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자립적으로 존재 가능한 것)이라고 해서 신 존재도 필연적이라고 잘못 가정하는 것이고 착각이다.

 

인간 이성은 자신이 알 수 있는 인식 한계를 넘어서 있는 대상, 즉 형이상학적 대상에 대해서까지 알고 싶어한다. 이것은 이성의 어쩔 수 없는 운명이다.

 

칸트 이전의 인식론들은 우리 영혼이 일종의 거울과 같이 바깥의 대상을 있는 그대로 비춘다고 보았다(모사설). 나무는 우리가 우리의 렌즈로 이렇게 저렇게 바꿀 수 없는 나름의 짜여진 구조를 가지고 있고, 우리는 그것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일 뿐이다. 하지만, 칸트는 이러한 인식론적 관점을 거꾸로 뒤집는다. 우리 영혼은 가만히 서 있는 거울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움직여서 인식을 찍어내는 기계와 같다. 바깥 대상은 우리의 인식작용을 받기 전에는 잡다하고 혼란하고 무질서한 상태이다 나무는 초록색, 직선, 곡선, 향기 등의 혼란한 뭉치에 불과하며 그것이 우리 안에 들어와서 뚜렷한 나무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나무가 나름의 구조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우리 인식기능이 나름의 구조를 가지는 것이다. 칸트 인식론에서 주관은 수동성에서 능동성으로 바뀌게 된다. 이런 인식론적 전환은 천동설에서 지동설로의 전환에 비유하여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불리운다.  칸트에서는 신이 아니라 인간이 자연의 입법자이며, 자연법칙은 인간 정신의 본질에서 나온 것이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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