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알고싶다(257) — 화학과 관련된 발견과 특허 이야기: 합성화학과 아스피린(5/n)
아스피린(aspirin) 또는 아세틸 살리실산(acetylsalicylic acid, ASA)은 최초로 합성된 해열∙소염 진통제이자 혈전예방약인 살리실산염 의약품으로, 비스테로이드성 항염증제(non-steroidal anti-inflammatory drugs, NSAIDs)의 일종이다. 즉, 오늘날 통증과 열을 완화시켜 주는 진통제, 해열제로 쓰이고, 항혈전 효과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용량을 낮추어 심혈관질환이나 심장마비 예방약으로 장기간 쓰기도 하는데, 진통이나 해열 목적으로 사용하는 경우 효과는 투여 후 30분 정도 만에 나타난다.
역사상 그 어떤 약보다 더 많이 팔린 유명 의약품인 아스피린이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살펴보기 전에 합성화학의 탄생과 합성염료의 탄생에 대해서 살펴본다.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과거에는 생물 또는 유기물이 무기물과 근본적으로 다르며, 따라서 생물의 세계를 살아 움직이게 하는 어떤 생명의 힘이 있다는 생각(소위, 생기론, vitalism)이 널리 퍼져 있었는데, 이러한 생기론은 과학적인 근거보다는 종교적 확신 등을 근거로 했으며 일반적으로 무기물에서 유기물을 합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상황에서 프리드리히 뵐러(Friedrich Wöhler)는 무기물에서 유기물을 합성하는 것이 가능함을 증명하게 된다. 참고로, 뵐러는 시안산(cyanic acid, HOCN)을 발견했으며, 유스투스 리비히(Justus von Liebig)와 공동으로 연구한 이성질체(isomer)의 존재를 강조하여 화학구조이론에 선구적 공헌을 하였다.
유기화학의 탄생과 관련해서, 뵐러는 1828년에 무기물인 시안산암모늄으로부터 유기물인 요소(urea)를 합성하고 유기화합물의 실험실 합성의 가능성을 주장함으로써 유기화학의 발전에 큰 자극을 주었으며, 이에 대해 생기론이 뵐러에 의해 부정되었다는 주장을 하는 과학사가도 있다. 즉, 1830년대에 이르렀을 때 합성화학 또는 유기화학이라는 화학의 새로운 하위 분야가 나타났던 것이다. 그리고, 리비히와 뵐러에 이어서, 아치볼드 쿠퍼(Archibald Couper), 아우구스트 케쿨레(August Kekulé) 등에 의해서 초기 유기화학이 독일을 중심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러한 초기 유기화학의 발전과 ‘돈 또는 자본주의’와 관련있는 것들 중 하나가 바로 합성염료인데 이는 오늘날에도 라인강을 따라 늘어서 있는 노바티스, 바이엘, 머크, 호프만–로슈, 베링거 인겔하임, 획스트의 본사와 같은 규모가 크고 뛰어난 제약회사들로 상징되는 스위스와 독일의 제약산업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그것은 나프톨옐로(naphthol yellow)나 크로세인오렌지(crocein orange), 메틸바이올렛(methyl violet)과 같은 색의 발명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4000년 동안 인간은 동식물을 이용해 천을 염색했는데, 보라색이나 심홍색처럼 강렬한 색은 가격이 매우 비쌌기 때문에 이런 색의 옷 또는 색 자체가 종종 귀족이나 왕족 같은 지위를 상징하기도 했다. 그런데 19세기 초 영국의 존 돌턴(John Dalton)이 제안한 원자론은 화학물질의 개별 성분을 이해할 수 있는 합리적인 틀을 제공함으로써 빠르게 성장하던 화학에 활기를 불어넣었으며, 돌턴 이후 과학자들은 모든 화학물질이 특정한 분자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초기 유기화학의 발전이 있었다. 이와 같은 새로운 사고방식과 과학적 방법에 기반하여 화학자들은 많은 고대 약이나 천연염료의 구성성분을 밝히고 정확한 순도를 알아낼 수 있게 되었다. 과학적인 화학이 등장하기 이전에는 꽃이나 나무, 식물의 진짜 성분을 알 수도 없고 구별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화학이 원자론 등에 그 근거를 두자 마침내 화학은 약이나 천연염료가 어떤 분자로 이루어져 있는지 그리고 어떤 분자가 활성 성분인지 알아낼 수 있는 실용적인 도구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화학은 그보다도 더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게 된다. 1830년대에 합성화학 또는 유기화학이라는 화학의 새로운 하위 분야가 나타난 이후, 많은 수익을 내기 위해 합성화학을 처음으로 도입한 곳은 염색회사였는데, 그 시작은 영국에서부터였다.
1856년에 십대 소년이었던 윌리엄 퍼킨(William Perkin)은 좁은 집 안에서 요즘 고등학생이 가정용 화학 키트를 가지고 노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은 초보적인 합성화학 기술로 실험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퀴닌(quinine, 참고1: 남아메리카의 키나라는 나무의 나무껍질에서 얻을 수 있는 말라리아 치료제, 참고2: 페루 국기의 방패문장 오른쪽 위에 그려진 식물이 바로 키나 나무)을 합성하려던 퍼킨은 뜻밖에도 실험의 결과로 얻은 자줏빛을 띤 밝은색의 화학물질이 실크를 염색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퍼킨은 이전에 본 적이 없는 색을 아닐린 퍼플(aniline purple)이라고 불렀고, 나중에 프랑스에서는 모브(mauveine 또는 Perkin’s mauve)라고 불리게 된다. 바로 이것이 세계 최초의 합성염료였던 것인데, 모브는 몇 년 지나지 않아 세계적으로 합성염료 산업을 크게 일으키게 된다. 이는 값비싼 동식물에 의지해 천연염료를 만드는 대신, 처음으로 회사가 실험실에서 화학물질을 섞어 천을 염색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염색회사는 얼마의 시간이 지나지 않아 어떤 색을 띠는 물질의 화학식을 살짝 바꾸면(즉, 작용기 등을 합성화학 또는 유기화학적 방법으로 살짝 바꾸면) 쉽게 다른 색을 띠는 물질로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즉, 빨간 염료 분자에 원자 몇 개만 추가하면 처음 보는 멋진 남색, 심홍색, 보라색이 나타났던 것이다. 합성염료는 공장에서 아주 효율적이고 정량적인 방법으로 생산할 수 있었으므로 전통적인 식물 염료보다 가격도 훨씬 저렴했으며, 당연하게도 사람들의 패션을 영원히 바꾸었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중산층은 물론 저소득층도 생생하고 매력적인 색상의 옷을 입을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최초의 합성염료를 영국의 퍼킨이 만들었지만, 19세기의 독일에는 강력한 자본주의 문화와 우수한 합성화학자 집단이 있었다. 그 결과 독일의 염료 산업은 품질 좋은 합성염료로 세계 시장에서 재빨리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독일의 염료 공장은 대부분 라인강을 따라 위치해 있었는데, 이는 유럽의 주요 도시가 가까우며, 강을 따라 독일, 중부 유럽, 북유럽, 그리고 북해를 통해 전 세계로 원재료와 완성된 제품을 수송하는 길이 열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라인강의 염색회사들은 세계를 이끄는 합성염료 생산자가 됐을 뿐 아니라 합성화학, 색을 갈망하는 대중으로부터 얻은 이익을 이용한 첨단 연구의 지배자가 되었다. 그리고 가장 성공적인 회사 중 하나가 바로 프리드리히 바이엘 앤 컴퍼니(이하 바이엘)였는데, 1880년대 초에 합성화학 분야의 전문성이 점점 좋아지자 회사의 경영진은 이를 이용한 새로운 제품을 찾기 시작했고, 경영진 중 한 명이었던 칼 두이스베르크(Carl Duisberg)가 의약품으로 눈을 돌렸고 회사에서 화학 연구를 이끌었던 아르투어 아이헹륀(Arthur Eichengrün) 등의 노력으로 탄생하게 된 최초의 합성의약품이 바로 아스피린과 헤로인(heroin)이었던 것이다.
참고로 아스피린의 기원에 관한 대부분의 교과서나 역사서에 아이헹륀의 이름이 빠져 있고, 대신 아이헹륀의 후배 화학자인 펠릭스 호프만(Felix Hoffmann)이 보통 아스피린의 발명자로 나온다. 즉, 아스피린의 기원에 관한 대부분의 교과서나 역사서의 전형적인 설명에 따르면, 호프만이 류머티즘 때문에 먹는 살리실산나트륨의 부작용으로 괴로워하는 아버지를 위해 아스피린을 개발했다는 것이다. 아스피린의 기원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최근의 책들에 따르면, 호프만은 아스피린의 역사에서 그다지 비중이 없는 인물로, 단지 아이헹륀의 요구에 따라 살리실산에 아세틸 그룹을 붙였다고 하는데, 왜 진실에서 이렇게 멀리 떨어진 설명이 유명해졌을까? 아스피린의 기원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최근의 책들에 따르면, 나치에 책임을 물을 수 있다고 한다. 즉, 바이엘은 1930년대까지 아스피린의 발명에 관한 이야기를 출판하지 않았으며, 신약을 홍보하기 위해 회사의 과학적 발견을 보고할 때조차도 아이헹륀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이헹륀이 아스피린 발견을 성공적으로 이끈 지 50년 만에 바이엘이 마침내 그 과정을 대중 상대로 출판했을 때 독일에서는 나치가 권력을 잡고 있었고, 유대인이었던 아이헹륀은 아스피린의 발명에 관한 이야기에 등장하지 못했던 것이라고 한다.
1888년에 두이스베르크는 새로운 의약품을 발명하는 임무를 띠고 바이엘 제약 연구단을 만들었는데, 그는 기존 약의 생산 공정을 개선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과거에 없던 새로운 약을 만들려고 했다고 한다. 합성염료를 만드는 방식을 참고해서 기존의 약을 보다더 좋은 약이 될 때까지 화학적으로 변형하고자 하였고, 그의 첫 번째 후보는 살리실산이라는 흔한 약이었던 것이다.
살리실산염은 수천 년 동안 열과 통증, 염증을 줄이는 데 쓰였다. 즉, 버드나무 껍질에 함유된 살리실산은 기원전 1,500년쯤 고대 이집트에서 작성된 파피루스에서도 언급되었다고 하며, 기원전 400년쯤에는 의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그리스의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가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그 후 2,000여 년이 지나 영국에서 에드워드 스톤(Edward Stone)이라는 성직자가 백버드나무 껍질 즙을 열이 있는 사람 50명에게 먹여 해열작용을 확인했으며 이 사실을 1763년 런던 왕립학회에서 발표했다고 한다. 그리고 약 60년 후에 이탈리아의 라파엘레 피리아(Raffaele Piria)가 버드나무 껍질에서 약효의 주성분을 분리했으며 그 뒤 몇 단계 화학 반응을 거쳐 아스피린의 모체인 실리실산을 얻었다고 한다(참고로 피리아는 버드나무를 뜻하는 라틴어 살릭스에서 따온 살리실산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그런데 정제해서 얻은 살리실산은 의학적인 효과가 있었지만 위벽을 자극하며 설사를 일으키고, 이명, 메스꺼움, 그리고 많이 먹을 경우 죽는 경우 등의 부작용이 있다. 그렇지만 당시의 의사들이 살리실산염 약품의 효능을 인식하게 되어 이 약의 사용은 19세기 중반까지 계속 늘어나 마침내 모든 의사의 약품 가방에 꼭 들어가는 요소가 되었다. 그래서, 두이스베르크는 만약 살리실산의 부작용을 줄이면서 항염증 성질을 유지하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면 이 약을 개선할, 그리고 큰돈을 벌 기회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식물로부터 추출해서 얻을 수 있는 유기 화학물은 굉장히 복잡하고 실험실에서 합성하거나 변형하기 어렵다. 그러나 살리실산이 그 간단한 분자 구조 덕분에 변형하기에 유별나게 좋은 후보였던 것은 두이스베르크와 그의 부하 직원이자 합성화학 팀장이었던 아이헹륀의 행운이었다. 그리고 1897년 8월에 아이헹륀은 자신의 부서에서 일하는 후배 화학자 펠릭스 호프만에게 아세틸(CH3COO-) 작용기를 식물에서 유래한 두 가지 이름난 약, 모르핀과 살리실산에 붙여보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그리고 호프만은 두 개의 아세틸 작용기를 아편의 주성분인 모르핀에 붙여서 디아세틸모르핀(diacetylmorphine, 헤로인)이라는 새로운 합성 물질을 만들었고, 또 하나의 아세틸 작용기를 살리실산에 붙여 아세틸살리실산(아스피린)이라는 새로운 합성 물질을 만들었다는 것이 아스피린의 기원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최근의 책들의 내용이다.
두 합성 약물은 당당하게 임상시험을 통과했으며, 바이엘은 대중에게 판매할 준비를 하였는데, 아스피린이라는 제품명은 1899년에 정했다고 한다(acetyl의 a에 터리풀을 뜻하는 라틴어 Spirea ulmaria를 더한 후, 당시의 약에 쓰는 표준 접미사 in을 붙였던 것이다.). 그런데, 바이엘은 예상치 못했던 실망스러운 일을 겪게 되는데, 다른 연구자가 이미 과거에 아세틸살리실산 합성을 보고한 적이 있어서 독일에서의 특허 신청이 거절당한 것이다. 그런데, 바이엘에게는 너무나 다행스럽게도, 독일에서는 독점적인 특허를 갖지는 못했지만, 미국에서는 바이엘이 특허를 받게 된다. 그리고,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아스피린은 곧 합성화학의 시대에 나온 최초의 블록버스터 신약이 되며, 오늘날에도 바이엘의 아스피린은 스테디셀러로 남아 있다. 즉, 21세기까지 변하지 않고 살아남은 몇 안 되는 19세기 약 중 하나가 바로 아스피린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