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 14, 2024

ssh's stories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과학, 알고싶다(303) — 인간 유전체 프로젝트(Human Genome Project, HGP)와 관련된 이야기

 

1992년, 인간 유전체의 염기 서열 분석(sequencing, 시퀸싱)을 향한 도전이 시작될 때, 유전학자 월터 길버트(Walter Gilbert)는 한 심포지움에서 주머니의 CD를 꺼내 청중에게 “’여기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나입니다.’라고 조만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길버트의 이와 같은 표현은 인간 유전체를 구성하는 30억 개의 염기를 서열 분석하려는 야심찬 국제적 노력(당시, 한 명의 염기 서열 분석을 위해 30억 달러, 즉 염기 당 1달러 정도로 추정되었다.)인 인간 유전체 프로젝트(Human Genome Project, HGP)에 대한 대중의 지지와 열정을 얻기 위한 캠페인에서 많은 호응을 얻었다. 특히, 많은 분자생물학자들은 캘리포니아에서든 어디에서든 CD를 들고 그들의 청중에게 이것이 인간의 삶 그 자체라고 말하면서 HGP를 홍보하였다. 1990년대의 청중에게 너무나 친숙한 CD는 HGP가 예고한 생물의학 내지는 유전학 연구의 ‘분자화(molecularization)와 디지털화(digitalization)의 통합’을 상징하기 위해 사용된 것이다. 인간 유전체학(Human Genomics)은 인간 본성에 대한 새로운 정의와 질병 등의 원인을 제거하고 심지어 인간 유전체 자체를 재설계할 수 있는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게 된다.

 

HGP에 관한 이야기를 좀더 이어가기 전에 1953년으로 돌아가 보자. 1953년에 동물학자인 제임스왓슨(James Watson)과 물리학자인 프란시스 크릭(Francis Crick)이 4개의 작은 분자, 즉 염기인 아데닌, 시토신, 구아닌 및 티미딘(각각 A, C, G 및 T)으로 이루어진, 오늘날에는 너무도 유명한, DNA의 이중 나선 구조에 관한 논문을 발표한다. 당시 킹스 칼리지 런던(King ‘s College London)에서 생물물리학자인 모리스 윌킨스(Maurice Wilkins)와 X-선 결정학자인 로잘린드 프랭클린(Rosalind Franklin)도 DNA의 구조에 관한 연구를 하고 있었는데, 아마도 부서장의 부실한 관리 때문에 서로의 연구에 대해 알지 못했고, 그들은 같은 문제를 각각 따로 해결해야 했다. 그런데, 윌킨스는 자신이 DNA 구조 연구에 대한 책임자라고 생각하고 프랭클린의 중요한 데이터를 왓슨과 크릭에게 전달했다. 즉, 프랭클린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DNA 구조에 관한 X-선 이미지가 그녀가 알지 못하거나 동의하지 않은 상태에서 ‘공유’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아니, 좀더 직설적으로는 그녀는 자신의 X-선 이미지를 도난당했다고 할 수 있다.

 

왓슨과 크릭은 그들의 1953년 네이처 논문의 거의 마지막 부분에 생명체에 있어서 DNA가 가지는 중요성을, ‘It was not escaped our notice that the structure we have postulated immediately suggests a possible copying mechanism for the genetic material.’라는 표현으로 강조했는데, DNA 구조의 생명과학에 있어서의 이와 같은 중요성은 국제 과학계에서 즉각적으로 인식되었지만 대중의 관심은 거의 없었으며 언론 역시 그 중요성을 미처 인식하지 못했다. 프랭클린이 사망하고 세 사람(왓슨, 크릭, 윌킨스, 참고로 세 사람이 노벨상 수상 연설을 했을 때 아무도 플랭클린의 기여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이 공동으로 노벨상을 받은 1962년 이후인 1968년에 왓슨의 [이중 나선(The Douebl Helix)]이 출판된 후에 DNA는 대중의 관심을 받게 된다. 왓슨의 책은 두 사람(왓슨과 크릭)의 야망과 경쟁, 무단 데이터 획득, 그리고 DNA 구조 해석을 가능하게 만든 중요한 X-선 실험 결과를 얻은 프랭클린에게 적절하게 행동하지 못한 그들의 행태를 얼굴을 붉히지 않고 드러냈다. 참고로, 윌킨스는 당시 그와 크릭이 왓슨을 고소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고 그의 자서전에서 언급했으며, 플랭클린의 많은 X-선 결정학자 동료들은 왓슨이 프랭클린을 부당하고 모욕적으로 대하는 것에 크게 분노했다고 한다.

 

이후 수십 년 동안 유전학 및 분자 생물학은 돌이킬 수 없는 빅 사이언스(big science)로 변모했다. 유전체학(전체 유전체 분석, genomics) 시대가 도래하려면 인간 유전학과 분자생물학의 융합이 필요했으며, 이 융합은 새로운 정보학에 의해서만 가능했다. 이 새로운 학문적 구성으로 자본-노동 비율은 노동집약형에서 자본집약형으로 역전되었다. 장비 제조와 시약 생산이 전문업체에 아웃소싱되는 등 실험실의 연구가 자동화되었다. 염기 서열을 분석하는 오늘날의 연구실은 벤치를 따라 배치된 가정용 전자레인지 크기의 기계들이 있는 거대한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1950년대의 분주한 실험실과 비교한다면, 가운을 입은 기술자가 조용히 기계를 돌보고 연구원들은 사무실에 앉아 인쇄물을 읽고 있는 모습 등이 대조된다.

 

대규모의 염기 서열 분석 연구실에서 나오는 논문에는 수백 명의 저자가 있을 수 있다. 심지어 기관들까지 포함된다. 그리고 연구 결과로 얻은 지식은 지적 재산이 되었으며 특허를 받아야 한다. 언론이 연구 결과에 대한 기사를 다룰지 여부를 우연에 맡기기에는 투자된 연구비가 너무 크기 때문에, 연구실이 소속된 기관의 언론 담당 부서와 함께 수석 연구원 등이 신중하게 보도 자료를 작성한다. 한편, 논문을 출판하는 저널 역시 온라인 사전공개 등을 통해 논문의 영향력을 증폭시키고, 그 다음에는 과학저널리스트가 건강 관리 및 부의 창출에 대한 가능한 기여 등에 관해 작성한 요약본을 제공하여 해당 분야에서 논문의 중요성을 설명하고 권위 있는 학술지로서의 위상을 강화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과학 커뮤니케이션의 이러한 새로운 역할은 지식이 지적 재산이 된 오늘날의 시장에서 생명과학 연구가 긍정적으로 보일 수 있도록 한다.

 

한편 오늘날의 생명과학 연구는 물리적으로나 재정적으로나 대학에서 스핀오프 기업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생명공학이 유전자 치료에서 신약에 이르기까지 임상 개입으로 이어질 유전자 진단도 가능하게 될 것이라는 많은 사람들의 희망에 힘입어 왔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선도적인 생물학자와 유전학자들은 기업가가 되어 실험실의 원활하고 성공적인 운영만큼이나 주식과 주식의 가치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의 중요한 단계는 1980년에 미국에서 내려진 두 가지 결정이었다. 그 첫 번째는 미국 대법원의 판결이다. 제너럴 일렉트릭(General Electric)에서 일하는 미생물학자인 아난다 차크라바티(Ananda Chakrabarty)는 1972년에 기름을 분해할 수 있는 유전적으로 변형된 박테리아를 얻었는데, 이 박테리아를 이용하면 유출된 기름을 정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특허를 신청했다. 하지만 미국 특허청은 살아있는 유기체는 특허를 받을 수 없다는 이유로 특허 출원을 거절했다. 이에 차크라바티는 항고했고, 결국 대법원은 판결문에서 ‘인간이 만든 것이라면 태양 아래 어떠한 것’도 특허가 될 수 있다고 결론지으며 차크라바티의 손을 들어주게 되어 ‘생물특허’가 탄생하게 된다(약 20년 후 미국 하급 법원의 판결은 이와 같은 다이아몬드(Diamond, 당시 특허청장의 이름이 다이아몬드였다.) vs. 차크라바티 사건에 대한 판결을 효과적으로 뒤집었지만, 이와 같은 생물특허 관련 사건에는 너무 많은 돈이 걸려 있기 때문에 앞으로도 특허 싸움이 끝날 것 같지 않다.). 그리고, 두 번째가 같은 해에 미국 의회에서 통과된, 연방의 자금으로 지원되는 연구에서 발생하는 발명과 제품에 대한 지적 재산권을 대학에 부여하는 바이돌(Bayh-Dole) 법이다. 즉, 다이아몬드 vs. 차크라바티 사건에 대한 대법원 판결과 바이돌 법이라는 두 가지 결정으로 수문이 열리게 된 것이다. 따라서, 유전적으로 변형된 벌레, 쥐와 같은 인공 동물, 심지어는 DNA 가닥까지 모든 것이 특허를 받을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유전자가 변형된 대장균에서 추출한 인슐린에 대한 첫 번째 특허는 생명공학 회사 제넨텍(Genentech)에 부여되었다. 다이아몬드 vs. 차크라바티 사건에 대한 대법원 판결과 바이돌 법은 과학을 매우 관심을 많이 받는 과학으로 변모시키는 쌍둥이 표식이다. 이 새로운 과학 하이브리드 생산 시스템은 과거의 시스템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DNA는 생명체의 삶에서 두 가지 뚜렷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 왓슨과 크릭이 즉시 깨달았듯이, DNA의 이중 나선 구조는 풀렸을 때 나선의 각 가닥이 다른 가닥이 만들어질 수 있는 주형(template) 역할을 하여 두 개의 동일한 DNA 분자가 생성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의 유전 정보 전달을 가능하게 한다. 두 번째 기능은 유전 정보의 암호화이다. As, Cs, Gs 및 Ts의 고유한 서열로 작성된 유전자 코드는 중간체인 RNA를 통해 단백질 합성을 지시한다. 왓슨과 크릭의 1953년 논문이 발표될 당시에는 하나의 유전자가 하나의 특정 단백질을 암호화한다고 알려져 있었는데, 크릭은 이를 확장하여 분자 유전학의 중심 교리(Central Dogma)라고 불렀다 – ‘DNA가 RNA를 만들면 단백질이 우리를 만듭니다’. 그는 DNA를 정보성 거대분자로 설명했고 DNA에서 단백질로의 흐름을 정보의 일방적인, 즉 한 쪽 방향의 전달로 보았다. 그러나 크릭이 그의 중심 교리를 공식화한 후 수십 년 동안, 중심 교리의 우아한 명확성은 분명히 흐릿해졌다. 정보의 흐름이 그가 상상했던 것보다 덜 일방적일 뿐만 아니라, 단백질을 암호화하는 유전자가 전체 DNA의 작은 부분만을 구성한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 인간의 경우 단백질을 암호화하는 유전자는 전체 DNA의 2% 미만이며, 한때 나머지 98%는 생물학적 기능이 거의 또는 전혀 없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정크(junk) DNA’라고 폄하되었다. 그렇다면 서열의 많은 부분이 ‘쓰레기’일 경우 왜 HGP가 제안한 것처럼 전체 게놈(genome)의 서열을 지정해야 할까? HGP를 구상하던 당시 임상적 희망을 제시하고 향후 특허 가능성을 높인 것은 정크 DNA가 아닌 단백질을 암호화하는 유전자였다.

 

약 7,000 가지의 다양한 질병은 – 일부는 전 세계적으로 소수의 가족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극히 드문 질병이고 다른 일부는 유럽인의 신생아 3,000명 중 1명에게 영향을 미치는 낭포성 섬유증(cystic fibrosis) 또는 아프리카인들 사이에서 100명 중 2명에게 영향을 미치는 더 심각한 겸상 적혈구 빈혈(sickle-cell anemia)와 같은 일반적인 질병이다. – 멘델(Meldel) 방식으로 유전된다. 즉, 이러한 질병들은 이상이 생긴 생화학적 경로에 필요한 많은 유전자 중 하나에 영향을 미치는 하나의 돌연변이를 통해 자손에게 전달됩니다. 그리고, 일부 질병의 경우 돌연변이 유전자가 우성이다 – 즉, 하나의 사본(대립유전자(allele)라고 함)으로 질병을 유발하기에 충분하다. 돌연변이 유전자가 우성이 아닌 경우, 즉 돌연변이 유전자가 열성인 경우에는 각 부모로부터 하나씩 유전되는 두 개의 사본이 필요하다. 사람이 두 개의 동일한 유전자 사본을 가지고 있으면 동형 접합체(homozygote), 하나만 있으면 이형 접합체(heterozygote)라고 한다. 참고로 색맹 및 듀시엔 근이영양증(Duchenne muscular dystrophy)과 같은 일부 질병과 관련된 유전자는 X 염색체에 있는 열성 유전자이다.

 

오늘날 세계의 많은 실험실들은 질병 관련 유전자를 사냥하고 있다. 목표는 간단하다. 일단 유전자가 발견되거나 적어도 염색체에서의 위치가 확인되면, 진단 또는 선별을 위한 (특허 가능한) 테스트를 생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생명공학 회사에 엄청난 이익이 될 수 있다. 유방암에 걸리기 쉬운 유전자 BRCA1은 1990년에 확인되었고 미국에 기반을 둔 미리어드 제네틱스(Myriad Genetics)는 이 유전자의 염기 서열에 대해 국제 시장에 특허를 냈고, 이 유전자에 대한 진단에 3,000달러를 부과하여 수년 동안 큰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참고로, 프랑스는 미리어드 제네틱스가 특허받은 DNA 서열의 유효성에 이의를 제기하고 특허를 우회했는데, 프랑스인의 DNA 염기서열이 다르다고 말했다. 다른 유럽 국가들은 미리어드 제네틱스 특허의 유효성을 인정하고 그 비용을 지불했다. 그리고 2010년에는 이 특허에 대해 미국 시민 자유 연합(American Civil Liberties Union)이 이의를 제기한 바 있다. 특허와 관련된 엄청난 돈을 감안할 때 다이아몬드 vs. 차크라바티 사건과 같은 법정 싸움은 계속될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21세기에 들어서는 생명특허의 윤리에 관한 심각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이러한 질병 진단을 넘어 돌연변이 유전자에 대해 제대로 기능하는 유전자로 대체하거나 추가하는 유전자 치료(gene therapy)의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유전자 치료 실패 사례 등으로 인해 급성장하는 생명공학 산업의 미래가 한동안 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치료는 진단보다 훨씬 어려웠던 것이다. 성인 또는 어린 아동에 대한 유전자 대체 기술(gene replacement, 치료 환자의 신체에만 영향을 미치고 자손에게는 전달되지 않는 체세포 유전자 요법(somatic gene therapy)을 통해)은 기술적으로 어렵고 건강에 유해하며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음이 입증되었다.

 

이제 염기 서열 분석 기술에 관해 살펴보자. 염기 서열 분석 기술은 DNA에 있는 As, Cs, Gs, Ts의 순서를 읽는 기술이다. 최초의 염기 서열 분석 기술은 수작업이었고 매우 노동집약적이었는데, 왓슨과 크릭도 일했던 케임브리지(Cambridge)의 분자생물학 연구소(Laboratory of Molecular Biology)의 프레데릭 생어(Frederick Sanger)에 의해 개발되었다. 생어는 단백질인 인슐린의 아미노산 서열 분석으로 이미 1958년에 노벨상을 받았고, 1960년대부터 RNA에서 염기서열을 분석하는 방법을 개발한 다음 DNA에서 염기서열을 분석하는 방법을 연구했다. 그의 분석 방법은 그 후 개발된 모든 자동화된 염기 서열 분석 기술의 기초가 된다. 염기 서열 분석 기술은, 본질적으로, 먼저 순수한 DNA 샘플을 준비한 다음, 그것을 크기 별로 분리할 수 있는 짧은 사슬로 자르고 각 개별 사슬을 염기 서열 분석하는 것에 의존한다. 마지막으로 짧은 서열은 원래 DNA의 전체 사슬에 있는 염기의 순서를 판독하기 위해 컴퓨터를 이용해서, 즉 알고리즘을 통해서 함께 맞춰져야 한다. 생어는 이 방법을 완성하고 박테리오파지(bacteriophage, 박테리아를 감염시키는 바이러스)의 48,500개 염기의 서열을 결정하는 데 약 15년이 걸렸다. 1980년에 그는 이 연구로 두 번째 노벨상을 받았는데, 이번에는 미국 분자생물학자인 폴 버그(Paul Berg)와 월터 길버트(Walter Gilbert)와 공동으로 수상했다. 그리고, 두 사람(버그와 길버트)은 유전학을 오늘날의 빅 사이언스로 바꾸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생어의 혁신은 여러 소규모 염기 서열 분석 프로젝트의 길을 열었다. 그 중에서 HGP와 관련된 역사를 고려할 때 아마도 가장 중요한 것은 생어의 동료였던 시드니 브레너(Sydney Brenner)가 1960년대 중반에 시작한 프로젝트일 것이다. 그는 단순한 형태의 다세포 유기체에 대한 해부학, 행동 및 유전학 등의 연구가 DNA 다음으로 중요한 생물학적 돌파구가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밀리미터 단위의 길이를 가지고 몸에 959개의 세포만 가지고 있는 작은 선충류인 예쁜꼬마선충(C. elegans)을 선택했고, 1980년대까지 그는 그의 젊은 동료 중 한 명인 존 설스턴(John Sulston)에게 예쁜꼬마선충 DNA의 1억 개 염기를 서열 분석하는 작업을 맡겼다. 설스턴의 기술과 끈기, 그리고 케임브리지 연구소의 명성은 그의 연구실이 웰컴 트러스트(Wellcome Trust)의 막대한 자금 지원을 받는 HGP의 영국 몫의 핵심이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참고로, 웰컴 트러스트는 1930년대 생화학 발전을 형성한 록펠러 재단(Rockefeller Foundation)과 유사한 역할을 현재 영국에서 하고 있다.

 

한편 인간 유전체는 생어의 박테리오파지보다 약 6,000배, 브레너의 예쁜꼬마선충보다 약 30배 더 길기 때문에 많은 생물학자들은 전체 길이를 서열 분석하는 것의 과학적 가치가 의심스럽다고 여기는 과학자들이 많았다. 그럼에도 비공식적이지만 국제적 협력에서 유럽, 일본 및 미국의 여러 학술 연구소는 특정 인간 염색체를 해독하는 작업을 분할해서 공동연구를 시작했으며, HGP의 출시와 함께 염기 서열 분석 프로젝트가 지배적이었다.

 

HGP의 시작과 궁극적인 성공과 관련된 이야기는 과대 광고, 제도적 경쟁, 이익에 대한 약속, 기술적 탁월함, 과학적 자만심이 교차하는 이야기이다. 전체 인간 게놈의 염기서열 분석을 제안한 최초의 분자 생물학자 중 한 사람은 캘리포니아의 소크 연구소(Salk Institute) 소장인 레나토 둘베코(Renato Dulbecco)였다. 둘베코는 닉슨 대통령의 암과의 전쟁에 참여함으로써 거창한 프로젝트를 추구했는데, 유전자 염기 서열 분석이 효과적인 암 치료법의 가장 현실적인 가능성을 제공한다는 그의 주장은 상상력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염기 서열 분석은 국제 분자생물학 커뮤니티에서 뜨거운 주제가 되었다.

 

프로젝트 기금을 모으기 위한 첫 번째 시도는 기능적 DNA 가닥의 선구적인 합성으로 찬사를 받은 분자 유전학자 로버트 신샤이머(Robert Sinsheimer)에 의해 이루어졌다. 1985년 UCSC(University of California, Santa Cruz)의 총장으로서 그는 대학의 위상을 높이기 위한 주요 연구 프로젝트를 모색했는데, 그가 결국 성공시킨 프로젝트는 게놈이었다. 신샤이머의 프로젝트는 실패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버트에게 다른 접근 방식을 시도하도록 영감을 주게 된다. 길버트는 새로운 유형의 유전학자이자 기업가로서 가장 저명한 사람이었다. 참고로, 그의 경력은 하버드와 그의 회사인 바이오젠(Biogen) 사이를 오가며 이어졌고, 바이오젠이 파산했을 때 다시 하버드로 돌아가게 된다.

 

그리고 몇 번의 예비 시도가 실패한 후에야 미국 연방 자금 제공자 둘의 HGP에 대한 관여가 시작된다. 하나는 NIH (National Institute of Health)였고, 다른 하나는 HGP와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인다는 점에서 놀라운 에너지부(Department of Energy, DoE)였다. DoE의 기원은 1940년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데, 원자 무기의 개발과 이후 민간 원자력의 감독이 주요한 임무였는데, 그 임무에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황폐화시킨 원자 폭탄의 생존자, 특히 후손을 위한 방사선 노출의 의학적 및 유전적 결과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가 포함되었다. 1980년대까지 생존자에 대한 연구는 정책 입안자들을 만족시킬 만큼 충분한 명확한 결과를 내지 못했는데, 결과적으로 DoE의 생물의학 연구 부서의 차기 이사는 해당 부서의 미래를 보장하기 위해 새로운 대규모 유전학 프로젝트의 필요성을 깨닫게 된 것이다. 여담으로, 한 유전학자는 이것을 ‘중복된 폭탄 제작자를 위한 프로젝트’라고 냉소적으로 묘사한 바 있다.

 

HGP는 공공 및 정치적 지원 확보 및 유지, 그리고 자금 조달이라는 측면에서 생물학 역사상 최초의 빅 사이언스 프로젝트였다. 따라서 HGP 시작 이전 및 이후에 관련 과학자들의 수사학은 희망과 과대 광고를 융합함으로써 그들의 프로젝트를 ‘불의 발견’ 또는 ‘바퀴의 발명’ 등에 비유하기도 했는데, 다음은 HGP의 시작을 축하하는 생화학자 다니엘 코쉬랜드(Daniel Koshland)의 1989년 사이언스(Science) 기고문이다.

 

‘게놈 프로젝트의 과학에 대한 이점은 분명하다. 조울증, 알츠하이머병, 정신분열증, 심장병과 같은 질병은 아마도 모두 돌연변이가 원인이며, 낭포성 섬유증보다 해결하기 더 어렵다. 그러나 이러한 질병은 현재 많은 사회 문제의 근원이다. 정신 질환의 비용, 그로 인한 어려운 시민 자유 문제, 개인의 고통, 이 모든 것이 보살핌이 아닌 예방을 포함하는 조기 해결책을 요구한다. 이들 중 상당수가 노숙자인 것으로 판단되는데, 그들에 대한 현재의 창고형 대책이나 방치를 계속하는 것은 백신 개발을 희생하면서 소아마비 희생자들에게 철제 호흡 보호 장치를 제공하는 것과 같다.’

 

HGP가 시작된 후, 왓슨이 프로젝트의 전체 리더가 되었는데, HGP의 이사로 자신의 임명을 발표하는 기자 회견에서 왓슨은 프로젝트의 사회적 의미를 강조하면서 NIH-HGP 예산의 5%를 ELSI(윤리적 법적 및 사회적 함의) 연구에 할당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 후 몇 년 동안 HGP가 생명과학의 발전에 영향을 미친 것처럼 ELSI의 막대한 자금이 인문학 및 사회 과학의 발전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러나 왓슨은 NIH 이사인 버나딘 힐리(Bernardine Healy)와 매우 공개적인 의견 불일치와 지분에 대한 이해 충돌로 사임하면서 겨우 4년 동안 통치했다. 그의 후계자는 프랜시스 콜린스(Francis Collins)였다. 콜린스가 1993년에 프로젝트를 재구성하게 되면서, 국제 협력(실제로는 주로 미국과 영국) 노력을 통해 10년에 걸쳐 인간 게놈에 대한 염기 서열 분석이 이루어지게 된다. 미국 이외의 주요 센터는 영국의 생어 센터(Sanger Center, 현재 Sanger Institute로 개명됨)에 기반을 둔 설스턴의 연구팀이었다.

 

그러나 공적 자금 조달과 국제 분업을 위해 신중하게 협상한 계획은 젊고 맹렬한 야망과 뛰어난 재능을 지닌 생화학자에서 분자생물학자로 변신한 크레이그 벤터(Craig Venter)가 그 무대에 등장하면서 곧 산산조각이 나게 된다. NIH에서 근무하고 있던 벤터는 전통적인 염기 서열 분석법의 느리고 노동집약적인 접근 방식을 거부했다. 그는 자신이 개발한 기술(Expressed Sequence Tag, EST)을 사용하여 게놈 내에 포함된 유전자를 식별하는 빠른 방법을 제안했다. 태그는 단순히 자연에서 발견된 것이 아니라 인공적으로 합성되었기 때문에 NIH는 벤터의 연구팀이 발견한 347개의 EST에 대해 1991년에 특허를 출원했다. 그후 밴터는, 생어의 원래 절차보다 더 짧은 길이로 DNA를 분쇄하고 방대한 컴퓨팅 성능을 사용하여 염기 서열 분석 결과를 재조립하는, 훨씬 더 빠른 염기 서열 분석 방법(산탄총 시퀀싱, shotgun sequencing)을 제안했다. 설스턴 등은 이 방법이 오류로 가득 찬 염기 서열 분석 결과를 얻을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하면서 이 방법을 조롱했지만, 왓슨은 벤터의 새로운 접근 방식에 매료되어 대규모 보조금 제안서 작성해서 지원하라고 격려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 벤터는 그의 자서전에서 4번의 연속적인 지원에 대해 왓슨은 지원에 대한 심사 위원회에 자금을 지원하도록 설득할 능력이 없었거나 설득하려는 의사가 없었다고 말한다.

 

불운이었을까, 아니면 반칙이었을까? 두 사람의 충돌은 이것이 처음이 아니었다. 벤터의 경력 초기에 왓슨은 벤터의 연구 결과 중 하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그것이 모든 것을 설명합니다. 당신은 생화학자입니다.’ 벤터는 처음에는 그것을 칭찬으로 여겼는데 생화학자와 분자생물학자 사이에 일어난 지적 우위에 관한 긴 싸움을 알지 못했다고 말했다. 생화학은 상대적으로 더 오래된 학문이었고 생화학자들은 특히 왓슨과 크릭과 생화학에 대한 신참자들이 자신들의 영역에 뛰어드는 것에 거부감을 느꼈는데, 예를 들어 왓슨과 크릭이 1953년에 DNA 논문을 발표했을 때, 어윈 샤가프(Erwin Chargaff)는 그들이 ‘면허 없이 생화학을 하고 있다’고 비난한 바 있다.

 

이런 상황에서, 대규모 연구 제안서를 작성하는 작업에 지친 벤터는 민간 부문으로 눈을 돌렸다. 1992년에 그는 HGS(Human Genome Sciences)라는 회사를 통해 자금을 지원받아서 비영리 조직인 TIGR(유전 연구 연구소) 연구소를 새롭게 설립했다. 신약 개발 및 마케팅 회사인 HGS는 AIDS 연구원에서 기업가로 변신한 윌리엄 하셀틴(William Haseltine)이 만든 회사였다. 공공 프로젝트와 민간 프로젝트 간의 경쟁이 시작된 것이다. 처음에는 양측 사이의 호의적인 교류가 두드러졌지만, 1995년에 TIGR이 다른 연구자들보다 앞서서 2백만 염기 길이의 박테리아인 Haemophilus influenzae의 전체 염기 서열을 처음으로 발표했을 때에는 그 관계가 그렇게 좋지는 않았다.

 

1998년까지 과학자들의 노력으로 인간 염기서열의 약 4%가 분석되었는데, 이때 벤터에게 또다른 기회가 생긴다. 그는 분자생물학자인 클레어 프레이저(Clare Fraser)에게 TIGR을 맡기고, HGP 관련 공공 프로젝트에 대한 민간 라이벌로 자본금 9억 5천만 달러로 설립된 새로운 회사인 셀레라 게노믹스(Celera Genomics)의 사장이 되었다. 셀레라는 공공 프로젝트가 제안한 비용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비용(약 3억 달러)과 공공 프로젝트가 제안한 시간의 절반으로 산탄총 시퀀싱을 사용하여 염기 서열 분석을 완료할 것을 제안했다. 셀레라의 염기 서열 분석은 5명의 익명의 DNA 제공자에 대해 이루어졌는데, 염기 서열 분석에 사용된 DNA의 대부분이 벤터의 것이었음이 공개된 비밀이었다. 기본 전제는 분석된 인간 염기 서열이 개별 변이를 판별할 수 있는 참고용이 아니라 모든 인류를 위한 성과물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속도가 필요했는데, 셀레라는 과학 기기 제조업체 그룹인 PE(나중에 Applera로 이름 변경)의 자회사였기 때문에 공공 프로젝트에 비해 빠른 속도로 염기 서열 분석을 할 수 있었다. 특히 다른 PE 자회사인 어플라이드 바이오시스템스(Applied Biosystems, ABI)에서 근무하던 마이크 훈카필러(Mike Hunkapiller)가 생어의 방법을 수정함으로써 염기 서열 분석 속도를 크게 높일 수 있었다. ABI는 배열 결정장치(sequenator)라고 하는 자동화된 염기 서열 분석 기계를 구축했고 셀레라는 훈카필러의 기계가 빠른 속도로 생성하는 짧은 길이의 DNA 염기 서열 분석 결과를 결합해서 전체 서열을 결정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 컴퓨터 프로그래머를 모집했다.

 

벤터의 발빠른 움직임에, 콜린스와 설스턴 등 공공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던 과학자들은 긴장했다. 그리고 그들은 훈카필러의 배열 결정장치를 대량으로 구매하고 자체 프로그래머를 모집하고 염기 서열 분석 결과가 기계에서 나오는 즉시 인터넷에 데이터를 공개함으로써 벤터의 염기 서열에 대한 특허 취득 시도를 불가능하게 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벤터의 입장에서는, 인터넷에 공개된 데이터를 자신의 염기 서열 분석 결과에 통합할 수 있는 반면 공공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던 과학자들은 자신의 데이터에 대해 접근하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인터넷에 공개된 데이터는 벤터에게도 도움이 되었다.

 

2000년 인간 게놈 2개의 ‘첫 번째 초안’이 각각 네이처(Nature)와 사이언스에 보고되었을 때, 공공 프로젝트와 민간 프로젝트 간의 경쟁은 무승부로 선언되었다. 콜린스와 벤터가 옆에 있는 빌 클린턴(Bill Clinton) 미국 대통령과, 아무도 옆에 없는 상태로 영상 링크를 통해 연설하는 토니 블레어(Tony Blair) 영구 총리가, 인류에 대한 이 새로운 선물을 발표하는 공동 기자 회견을 개최했다. 다소 시기상조였던 기자 회견 후인 2003년에 인간 염기 서열 분석이 최종적으로 ​​완료되고 HGP를 공식적으로 종료된다. 참고로, 벤터는 2007년에 전체 게놈을 서열 분석하여 인터넷에 공개한 최초의 개인이 되었고, 두 번째는 왓슨이었다. 그리고, 브레너, 로버트 호비츠(Robert Horvitz)와 함께, 벤터가 아니라, 설스턴이 2002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로 결정되었는데 인간 게놈에 대한 것이 아니라 예쁜꼬마선충에 대한 것이라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인공 생명을 합성하려는 시도 등 생물학의 더 넓은 영역을 계속해서 주장해 온 벤터와는 대조적으로, 설스턴은 은퇴 후 연구실를 떠나 유전자에 대한 특허를 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였다. 그러나 21세기 생명기술 과학의 지배적인 목소리는 설스턴의 목소리가 아니라 벤터의 목소리이다.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error: Content is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