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 14, 2024

ssh's stories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과학, 알고싶다(251) — 화학자 이야기 – 험프리 데이비

 

1815년의 일이라고 한다. 당시 영국 뉴캐슬 광산에서 몇 차례 큰 폭발 사고가 나서 수천 명의 광부가 목숨을 잃었고, 영국 전역이 애도를 표했다. 그리고 험프리 데이비(Humphry Davy, 1778~1829)는 이 소식을 듣고 광부를 위한 안전등을 만들기로 결심하게 된다. 각고의 노력 끝에 데이비는 지금까지도 갱도 내에서 사용하는 안전등(‘데이비 램프’라고도 한다)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이 안전등은 광산 사고의 위험을 크게 줄였다.

 

데이비가 안전등의 특허를 출원했다면 엄청난 수입을 얻었을 것이다. 실제로 친구들은 특허 출원을 권유했다고 한다. 그러나 데이비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면서 특허 출원을 하지 않았다. “특허를 내면 큰돈을 벌 것이다. 그러면 나는 분명히 네 필의 말이 끄는 마차를 타고 거리를 의기양양하게 달리는 인물이 될 수 있겠지. 하지만 사람들이 그런 나를 보면 ‘네 필의 말이 끄는 마차를 타고 다니는군.’이라고 말하면서 뒤로는 조롱할 걸세. 어떻게 내가 그런 일을 한단 말인가? 어떻게 특허를 낸단 말인가? 이 발명품은 그렇게 어려운 작업도 아니었으니 내가 우리 국민에게 주는 선물로 치겠네.”

 

이런 측면에서 데이비는 영국이 자랑스럽게 여길 만한 화학자이며, 과학자 중에서도 특히 존경받을 자격이 있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데이비가 높은 명망과 영예를 얻은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는 화학자로서 탁월한 공헌을 했을 뿐 아니라 화학 사상의 보급이라는 측면에서도 놀라운 일을 해냈다. 이런 공로 외에도 데이비는 사회와 인류의 행복을 위해 온힘을 다하고자 하는 정신을 가졌다. 데이비가 광부를 위한 안전등을 발명하고 그것에 대한 특허출원을 하지 않은 것 등은 과학사에 오랫동안 전해질 미담의 하나인 것이다.

 

그러나 이랬던 데이비가 명성을 얻고 난 후에는 사람들이 탄식할 만한 일을 몇 가지 저질렀다.

 

데이비의 청년기는 뜻을 품은 지식 청년의 모범이라고 할 만했다. 데이비는 1887년 12월 17일에 영국 콘월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라부아지에의 관점을 비판하는 논조의 논문을 쓴 후, 브리스톨에 사는 물리학자 토머스 베도스(Thomas Beddoes, 1760~1808)에게 논문을 보냈는데, 베도스는 데이비의 논문을 마음에 들어 했다고 한다. 마침 베도스는 기체 연구소를 세우려 준비 중이었는데, 그곳에 화학자가 필요했고, 베도스는 데이비가 적합한 인재라고 생각해 콘월로 직접 그를 만나러 갔으며, 이 일로 데이비는 브리스톨에서 기체 연구소의 책임연구원으로 일하게 되었다고 한다. 스무 살의 데이비는 이 기회를 아주 소중하게 여겼다. 그는 베도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산화질소(N₂O)가 인체에 무해하며 마취제로 사용할 수 있음을 밝혀냈다. 아산화질소는 ‘웃음 가스’라고도 불리는데, 이 기체를 들이마신 사람이 편안함을 느끼고 계속 웃음을 터뜨렸기 때문이다.

 

웃음 가스를 발견한 후, 데이비의 명성이 런던까지 전해지게 된다. 1801년, 그는 벤저민 톰슨(Benjamin Thompson, 1753~1814)의 추천을 받아 런던 왕립학회에서 보조 강사 자리를 맡게 된다. 데이비의 주 업무는 과학 지식을 대중에게 보급하는 것이었고, 그 밖에 몇 가지 과학 연구 과제도 진행했다. 데이비는 연구 능력도 뛰어났지만 과학 강연에 특출나 몇 차례 강연 후 금세 런던을 풍미하는 인물이 되었다. 그가 강연을 열면 사람이 몰려들어 화학이라고는 조금도 알지 못하면서 유행을 좇는 소녀들도 데이비의 얼굴을 보러 강연장에 올 정도였다고 한다. 영국의 시인 한명은 “데이비의 언어는 항상 선명하고 멋지다. 내가 이 과학자의 강연을 듣는 목적은 과학 지식을 쌓기 위함도 있지만 시인으로서 단어를 더 풍부하게 하기 위함도 있다.”고 칭찬하기도 했다고 한다.

 

1802년에 데이비는 교수로 승진하게 된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스물다섯 살이 채 안된 나이로 왕립학회 회원으로 위촉되었다. 런던 하늘에 과학계의 ‘스타’가 떠오른 것이다. 5년이 지난 후, 그는 과감하게 전기화학 연구로 분야를 넓혔다. 그는 볼타 전지를 이용해 전기분해로 금속인 칼륨, 나트륨, 칼슘, 스트론튬, 바륨, 마그네슘을 분리하는 데 성공했으며, 이에 따라 데이비는 세계 일류 화학자가 되었다.

 

이렇게 데이비가 한창 이름을 날릴 때, 데이비는 마이클 패러데이(Michael Faraday, 1791~1867)를 만나게 된다. 패러데이는 데이비보다 훨씬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고 정식 교육은 거의 받지 못했다. 그러나 패러데이에게는 데이비가 깊이 감동할 만큼 강인한 의지와 과학에 대한 열정이 있었다고 하며, 데이비는 분명 패러데이에게서 자신의 과거 모습을 발견했을 것이다. 데이비는 패러데이를 자신의 실험 조수로 삼았고, 그가 과학이라는 높은 봉우리에 오를 수 있게 도와주었다.

 

패러데이는 데이비의 도움과 격려에 더해 자신의 노력과 열정으로 점차 과학자로서 성과를 쌓게 된다. 당신이 만약 데이비라면 패러데이와 같은 제자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데이비가 ‘청출어람’한 제자를 자랑스럽게 여겨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하지만 과학사에서는 종종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발생하곤 한다.

 

1820년에 덴마크 물리학자 한스 외르스테드(Hans Ørsted, 1777~1851)가 전자기(電磁氣) 효과(도선 근처에 침 모양의 자석을 세워둔 후 도선에 전류를 흘리면 침 모양의 자석이 움직인다는 결과를 실험으로 얻었다. 이 실험으로 그때까지 서로 아무런 관련이 없는 별개의 것으로 여겨졌던 전기와 자기 사이에 관련이 있음이 드러나게 되었으며 전자기학이라는 새로운 분야가 생기게 된다.)를 발견한 직후, 많은 물리학자가 이 새로운 발견에 큰 흥미를 보였다. 하지만 데이비 같은 영국의 전기학 전문가들은 이 연구에 뛰어들기를 주저했고, 외르스테드가 전자기 효과를 발견한 지 6개월이 지나서야 전자기 현상에 대한 실질적인 연구를 시작하게 된다.

 

1821년, 영국의 과학자인 윌리엄 울러스턴(William Wollaston, 1766~1828)이 외르스테드의 전자기 효과를 깊이 고찰한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해냈다. “전류가 흐르는 도선 주변에서 침 모양의 자석의 바늘이 회전하다면, 반대로 전류가 흐르는 도선이 위아래가 금속인 통 사이를 통과할 때 커다란 자석이 그 도선 가까이로 접근한다면 도선은 반드시 자신을 축으로 하여 회전할 것이다. 전류가 흐르는 도선이 침 모양의 자석을 움직이게 했으니 자석 역시 전류가 흐르는 도선을 움직이게 해야 마땅하다.” 이와 같은 자신의 생각에 기뻤던 울러스턴은 데이비의 실험실로 가서 자신의 아이디어를 말해주며 실험을 도와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이에 두 사람은 여러 차례 실험을 거듭했지만 도선은 움직이지 않았고, 어쩔 수 없이 실험을 중단한 후 도선이 회전하지 않는 원인을 토론했다고 한다.

 

그런데, 토론이 한창일 때 패러데이가 들어왔고, 패러데이는 뛰어난 과학자 두 사람의 토론을 경청했다고 한다. 패러데이는 원래 전기학에 관심이 많았지만, 왕립학회에 들어와 데이비의 조수로 일하며 종일 화학 실험을 하느라 바빠 전기학 연구는 거의 하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그러던 중 전기학 관련 토론을 듣으면서 패러데이는 호기심이 생겼고 울러스턴의 실험이 실패한 원인을 꼭 밝혀내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한다.

 

패러데이 역시 울러스턴이 제시한 작용과 반작용 관계에서 생각을 시작했지만 곧 새로운 방법을 찾아냈다. “여러 개의 침 모양의 자석이 전류가 흐르는 도선 주변에서 원형을 형성한다는 것은, 침 모양의 자석의 힘이 도선을 회전시키려 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작용과 반작용에 따라 도선 역시 자석 주변을 회전하려 할 것이다.” 이런 생각은 울러스턴의 실험 설계와는 완전히 달랐다. 울러스턴의 설계는 전류가 흐르는 도선이 자신을 축으로 하여 회전한다는 것이었지만, 패러데이는 전류가 흐르는 도선이 자석의 극 주변을 회전할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이런 아이디어에 따라서 패러데이는 실험 장치를 하나 설계했고, 1821년 9월에 실험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인류 역사상 최초의 전동기가 탄생하게 된다(패러데이의 이 실험은 전자기력으로 회전 운동을 일으킨 것으로, 이것이 전동기의 기본 작동 원리이다.).

 

패러데이는 자신이 발견한 사실을 보고서로 작성해 <계간 과학 저널>에 보냈다. 그 후 아내와 휴가를 떠나 자신의 서른 번째 생일을 자축했다고 하는데, 패러데이가 휴가를 마치고 런던으로 돌아왔을 때는 10월이었다. 그는 자신의 발견이 시대에 한 획을 긋는 내용임을 예감했고, 런던에 돌아가면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을 것이라고 기대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의 예상과 달리 런던은 조롱과 멸시로 그를 맞이했고, 패러데이는 그 영문을 몰랐다. 며칠 후에야 그의 스승인 데이비가 패러데이의 실험이 울러스턴의 아이디어를 훔친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렸음을 알게 되었다.

 

패러데이는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고 한다. 데이비는 책 제본공으로 일하던 그를 화학자로 만들어주었으며, 따라서 패러데이는 늘 데이비를 존경했고, 데이비는 그의 능력을 인정하고 키워주었다. 그런데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데이비는 패러데이의 실험 설계가 방식과 이론적 해석 면에서 울러스턴의 생각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패러데이의 성공을 기뻐하지 않았을까? 다름 아닌 질투심과 허영심 때문이었다고 할 수 밖에 없다. 데이비는 유럽 여러 나라가 패러데이의 발견을 칭송하는 상황에 “울러스턴이 성공을 눈앞에서 놓쳤다”, “패러데이는 울러스턴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남이 거둔 성과를 훔쳐 제 것으로 만들었다” 등의 사실이 아닌 말을 퍼뜨렸기 때문이다.

 

패러데이는 처음에 이 모든 것이 오해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울러스턴에게 해명 편지를 보냈다. 울러스턴은 패러데이의 편지를 받은 후 ‘너무 고민하지 말고 이 일을 같이 논의해보자’고 온화하고 사리에 밝은 답신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토론 후 울러스턴은 패러데이의 실험 설계가 표절이 아님을 인정했고 그 후로 패러데이를 더욱 아끼고 신뢰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패러데이는 스승인 데이비가 자신을 모함했다는 것을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세상 사람들도 진상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어느 작가가 말했듯 질투심과 허영심은 치유할 수 없는 만성 질병처럼 두려운 존재이며 결국 인간을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데이비는 패러데이가 별 피해를 입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명성이 더 높아진 것을 보고 질투의 불길이 더 크게 타올랐다고 할 수 있다. 그는 패러데이가 발견한 액화 염소 가스를 자신의 공로로 만드는가 하면, 울러스턴 등 29명의 왕립학회 회원들이 패러데이를 회원 후보로 공동 지명했을 때도 완강하게 반대했다.

 

광산용 안전등의 특허권으로 부를 축적할 기회를 거부할 만큼 높은 도덕성을 지녔던 과학자 데이비가 이토록 변해버린 것이다. 데이비는 병이 위독해졌을 때에야 자신의 패러데이에 대한 질투심을 가라앉혔다. 누군가 그에게 인생에게 가장 위대한 발견이 무엇인지 묻자 마침내 다음과 같은 대답을 했다고 한다. “나의 가장 위대한 발견은 과학자 패러데이를 발견한 것이다.”

 

그렇다면 패러데이는 어땠을까? 그는 늙고 쇠약해졌을 때도 자주 벽에 걸린 데이비의 초상화를 가리키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고 한다. “참으로 위대한 인물이었지!”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error: Content is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