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알고싶다(252) — 화학자 이야기 – 앙리 무아상과 로버트 브리지만
연금술은 고대로부터 교양있는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아 놓아주지 않았다. 연금술의 역사적 의미 등에 대한 평가로 이런저런 이야기가 많긴 하지만, 근세가 되고서도 보일(Boyle, 1627~1691)이나 뉴턴(Newton, 1642~1726)같은 학자들까지 진지하게 연구하고 토론할 만큼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금’ 이상으로 귀중한 ‘다이아몬드’를 만들려는 시도는 연금술보다 한층 매력적인 시도이기는 하지만, 그 역사는 연금술만큼 길지는 않다. 성서나 베다(Veda, 바라문교의 성전) 등 고대의 성전에는 다이아몬드에 대한 언급이 있긴 하지만, 다이아몬드 제조의 역사는 연금술보다 짧은 것이다.
17세기 말부터 다이아몬드의 본질이 차츰 밝혀져 왔다고 할 수 있다. 1704년 뉴턴은 다이아몬드의 성질 중 하나가 가연성(combustible)이라는 사실을 지적했는데, 이것은 그 후의 많은 실험을 통해서, 특히 라부아지에(Lavoisier, 1743~1794)에 의해서 실증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1796년에 영국의 화학자 테난트(Tennant, 1761~1815, 이리듐(Ir, iridium)과 오스뮴(Os, osmium) 발견자)는 다이아몬드가 순수한 탄소라고 하는 것을 증명했으며, 이로부터 연금술의 현대판이라고도 할 다이아몬드 합성이라는 레이스의 개막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다이아몬드를 만들기 위한 시작 물질로, 쉽게 구할 수 있는 물질인 흑연(graphite, 참고로 이 당시에 흑연이 순수한 탄소로 이루어져 있다라는 사실이 이미 알려져 있었다.)이나 목탄(숯) 등이 고려되었다. 이 매력적인 시도에 도전한 발명가와 과학자의 수는 결코 적지 않았다. 과거의 연금술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당시의 일류 과학자들 중에도 이 시도에 참가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 중에는 몇 사람의 노벨상 수상자도 있었다.
그러던 중,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영국의 한 화학자가 1880년에 최초로 다이아몬드의 합성에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이 화학자의 보고는 처음에는 높이 평가를 받았었지만 차츰 이 보고에 대한 의혹이 쌓이게 된다. 그런데, 1896년에 프랑스의 화학자 앙리 모아상(Henri Moissan, 1852~1907, 1906년 ‘플루오르의 연구와 분리 및 모아상 전기로의 고안’으로 노벨 화학상 수상)의 다이아몬드 합성 보고는 당시 학회 등의 반론이나 의문 없이 받아들여졌다. 언급했던 영국의 화학자와는 달리 모아상은, 데이비(Davy, 1778~1829)를 비롯한 저명한 화학자들의 도전을 물리치고, 1886년에 플루오르 화합물의 전기분해를 통해서 플루오르를 처음으로 원소 상태로서 추출하는데 성공함으로써 당시의 최고 무기화학자로서의 명성을 떨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아상에게 있어서 다이아몬드 합성은 플루오르에 관한 연구의 연장선상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탄소의 플루오르 화합물을 처음으로 합성한 그는, 이 화합물로부터 적당한 방법으로 플루오르를 제거하면 탄소가 다이이몬드의 형태로서 남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전략에 따른 시도는 모두 실패로 끝났다. 그렇다면 다이아몬드가 천연으로 산출될 때의 환경을 모방하는 것이 지름길이 아닐까라고 생각한 모아상은, 고온을 얻기 위해 전기로를 고안하게 되었고, 그것이 이 연구에서의 큰 수확이 되었다. 그러나 고온 조건에서 탄소를 녹여도 흑연만 생성되었다. 이런 조건만으로는 무엇인가 부족한 것이 명백했다.
그 무렵, 미국에서 발견된 운석 속에 다이아몬드 미립자가 소량이나마 존재한다는 보고가 있었다. 모아상은 이것이야말로 다이아몬드 생성의 열쇠가 될 관찰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무정형(amorphous) 탄소가 고온의 용융철에 녹아 있고 그 때 철의 표면이 급격히 냉각 및 수축되면 내부의 탄소에 높은 압력이 걸려서, 결정형 탄소 즉 다이아몬드가 생성될 것이라고 추론했던 것이다. 이 생각은 각종 탄소의 밀도로부터도 지지되었다. 무정형 탄소(숯 등)나 흑연의 밀도는 각각 1.9, 2.25인 것과 비교해서, 다아이몬드의 밀도는 3.5이기 때문이다. 모아상은 이 전략에 따라 연구를 추진했다. 탄소를 포화할 때까지 녹여 넣은 용융철을 냉수 속으로 던져 넣은 뒤, 산 처리를 해서 흑연을 주성분으로 하는 남은 찌꺼기를 적당한 방법으로 처리함으로써, 밀도가 3~3.5인 검은색 또는 색깔이 없는 다이아몬드(와 비슷한) 미립자가 남았던 것이다.
하지만 모아상 자신이 이 결과에 만족한 것은 아니었다. 실험결과가 일정하지 않고, 얻어진 다이아몬드는 현미경적인 크기 밖에 안되어 실용에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이것이 마음에 걸려 여러 가지로 개량법을 계획하고 있었지만 실행할 수는 없었다. 당시 그의 연구는 폭이 상당히 넓어서 다이아몬드에만 전력을 집중할 수 없었을뿐만 아니라, 플루오르를 연구했던 당시의 화학자들 예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모아상 역시 플루오르의 맹독에 의해 55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르 샤틀리에(Le Chatlier, 1850~1936) 등에 의해 차츰 다이아몬드와 관련된 모아상의 다이아몬드 합성에 대한 비판적인 의견이 나오게 된다.
한펀, 증기터빈의 발명으로 유명했던 영국의 기술자 파슨스(Parsons, 1854~1931) 역시 다이아몬드 합성에 나섰다. 파슨스는 모아상 등의 실험을 반복하여 처음에는 성공했다고 생각했으나, 문득 의문을 품은 그는 실험을 더욱 주의깊게 반복함으로써, 그때까지 다이아몬드라고 생각되었던 투명한 결정이, 여러 가지 점에서 다이아몬드를 닮은 광물의 첨정석(spinel, 알루미늄과 마그네슘의 산화물로 이루어진 팔면체의 결정질 광물)에 지나지 않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게다가 모아상의 미망인이 파슨스에게 ‘남편의 조수가 고백한 바로는, 무한정 반복되는 실험에 짜증이 난 조수가, 한편에서는 남편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 다이아몬드의 파편을 시료 속에 몰래 넣었던 것’이라고 밝혔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게 되고, 모아상이 성공이라고 확신한 것은 사실 ‘그 자신에게는 죄가 없다하더라도’ 사람들을 시끌시끌하게 만든 장난에 불과했는지도 모른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그러나 이 이야기들 중 무엇이 진실인지는 현재 확인하기 어렵다.). 1928년 <Nature>에 게재된 보고에 따르면, ‘모든 일들을 종합해 보면, 실험실에서 다이아몬드가 합성된 일은 아직 없으며, 다이아몬드와 비슷한 광물에 현혹되었을 것이다’라고 한다.
과학이 발전함에 따라, 모아상에게 불리한 지식도 조금씩 쌓이게 된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흑연으로부터 다이아몬드로의 변환은, 탄소의 서로 다른 상 사이의 상전이(phase transition, 물질이 온도, 압력, 외부 자기장 따위의 외적인 조건에 따라 하나의 상(phase)에서 다른 상으로 바뀌는 현상, 예를 들면 융해, 고화, 기화, 응결 따위)이며, 어떤 조건에서 상전이가 일어나기 쉬운가는 열역학적인 실험과 계산으로 확인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미국의 화학열역학 연구자 로시니(Rossini, 1899~1990)에 의해, 13,000 기압 아래서는 흑연보다 다이아몬드쪽이 안정하다고 할 수 있는 온도는 존재하지 않지만, 16,000기압 이상이 되면 다이아몬드와 흑연이 평형에 도달하는 온도가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이러한 사실은, 모아상의 반응조건에서 얻어지는 압력은, 철의 강도로부터 생각했을 때 고작 수천 기압정도이기 때문에 다이아몬드가 생성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참고로, 모아상 등의 다이아몬드 합성에 대한 의심을 풀 기회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X-선 결정학이 결정적인 수단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영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던 시료(영국의 한 화학자가 합성했다고 1880년에 보고했던 다이아몬드 시료)를 1943년에 검사한 결과, 그 대부분이 다이아몬드였다고 한다. 다이아몬드는 적외선 흡수나 자외선 투과율에 의해서 I형과 II형으로 나누어지는데, 영국의 한 화학자가 합성했다고 1880년에 보고했던 다이아몬드 시료의 대부분은 천연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II형이었다는 것이다. 한편, 유감스럽게도 모아상의 다이아몬드는 끝내 그 소재를 밝히지 못했다. 그의 다이아몬드가 현존해 있으면 보다 깔끔한 결론이 얻어졌을 것이 틀림없다.
로시니의 열역학적인 데이터를 근거로 해서 근대적인 다이아몬드 합성에 나선 사람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업적을 올린 사람은 미국의 로버트 브리지만(Robert Bridgman, 1915~1974, 1946년 ‘초고압 압축기의 발명과 그것에 의한 고압물리학의 연구’로 노벨 물리학상 수상)이다. 그는 초고압 압축기를 발명함으로써, 초고압 조건에서의 물질 연구라고 하는 전혀 새로운 분야를 개척했다. 그런데, 그의 장치는 상온 조건에서 40만기압이라고 하는 초고압을 만들어 내기는 했지만, 흑연의 다이아몬드로의 변환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는 초고압뿐만 아니라 고온 역시 상전이의 필요조건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압축기를 고온에서도 쓸 수 있도록 개조했다. 그리고 2,000 ℃의 고온과 3만기압의 압력이라는 조건에서 흑연을 지속적으로 공급할 수 있었고, 아주 순간적이기는 했으나 3,000 ℃ 의 고온도 실현했다. 그런데, 그의 1943년 논문에 보고된 바와 같이, 다이아몬드의 흑연으로의 전이는 일어났지만 그것의 반대 현상(즉, 흑연의 다이아몬드로의 전이)은 관측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실험은 어떤 조건에서 흑연에서 다이아몬드로의 전이가 일어나기 쉬운가, 또 전이의 속도 역시 실제로는 중요한 문제라는 것을 확인했다는 점에서는 획기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제네랄 일렉트릭(General Electric)사 등이 프로젝트 팀을 1951년에 조직한 이후 4년 이상의 연구를 통해 인조(man-made) 다이아몬드를 성공적으로 합성하게 된다.